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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마신랑이 된 범생이 왕자
1408년(태종 8년) 2월 16일 궁중에서 어린 소년 하나가 결혼식을 올렸다. 소년은 1397년생이니 나이는 12살, 지금으로 보면 겨우 초등학교 5학년 나이였다. 그야말로 꼬마신랑이었다. 그 어린 소년이 두 살 많은 14세 소녀에게 장가를 든 것이다. 이 소년의 이름은 도였고, 군호는 충녕으로 훗날의 세종이었다. 신부가 된 소녀는 당시 우부대언(우부승지) 심온의 딸로 곧 소헌왕후 심씨였다.
소년은 위로 세 명의 누나와 두 명의 형이 있었다. 그리고 아래로는 오션파라다이스릴게임 남동생 하나와 여동생 하나가 있었다. 그들 외에도 여러 명의 이복형제들이 있었다. 누나와 형들도 모두 어린 나이에 시집가고 장가들었다. 큰누나(정순공주)는 소년보다 열두 살이 많았고, 둘째 누나(경정공주)는 열 살이 많았다. 두 명의 누나는 소년이 아주 어렸을 때 이미 시집을 간 상태였다. 두 명의 누나 아래로 세 명의 형들이 태어났지만 모두 일찍 죽었다 릴게임꽁머니 . 그리고 셋째 누나(경안공주)가 태어났다. 셋째 누나는 소년보다 네 살 많았다. 셋째 누나 다음에 연년생으로 큰형 제(양녕대군)가 태어났다. 큰형은 소년보다 세 살 위였다. 큰형은 부왕 이방원이 왕위에 올랐을 때 일곱 살이었고, 아홉 살에 원자에 책봉되어 열한 살에 왕세자가 됐다. 그리고 14세에 장가들었다. 그러니까 소년보다 한 해 먼저 결혼하여 세자빈 릴게임갓 을 맞아들였던 것이다. 큰형에 이어 둘째 형도 그 해에 열두 살의 나이로 결혼했다. 둘째 형의 이름은 보였고, 군호는 효령이었다. 소년과는 연년생이었고, 16개월 먼저 태어났다. 그렇듯 큰형과 둘째 형이 몇 달 상간으로 결혼하였고, 이제 소년의 차례였던 것이다.
큰형은 결혼 뒤에도 왕세자였기 때문에 궁궐에 남았지만, 둘째 형 보와 소년 도 야마토게임장 는 궁궐을 떠나야 했다. 사실 그들을 빨리 결혼시킨 것은 궁궐에서 내보내기 위함이었다. 12세 소년이면 이제 막 이성에게 관심을 기울일 나이이기에 혹 궁녀들과 염문이라도 돌까 두려워 서둘러서 장가보낸 것이다. 궁녀는 모두 왕의 여자들이다. 말하자면 아버지의 여자들이었던 것인데, 그들 아버지의 여자들과 아들에 대한 염문이 도는 것은 큰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 황금성릴게임 이다. 그래서 소년과 소년의 둘째 형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품을 떠나 궁 밖에서 살아야만 했다.
소년이 궁을 떠날 당시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는 몹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버지가 후궁을 들이는 문제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가 질투가 심하다는 핀잔만 듣고 울화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외삼촌들도 모두 유배된 상태였다. 또한 큰형도 두 번에 걸친 아버지의 전위 파동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다.
어머니 민씨와 아버지 태종의 불화는 그들 부부가 궁궐로 들어온 직후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소년의 아버지가 왕이 되어 소년이 궁궐에 처음 들어온 것은 네 살 때였다.
그때부터 소년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심한 갈등으로 서로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출입조차 감시했고, 어머니를 시중드는 시녀와 환관들을 쫓아내기까지 했다. 그 때문에 소년의 어머니 민씨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소년은 그런 어머니 아래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부모의 불화가 심했지만, 그나마 소년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형제들 중에 소년과 가장 잘 통했던 셋째 누나 경안공주였다. 경안공주는 마음이 어질고 공부를 좋아했으며 총명한 소녀였다. 소년 또한 독서를 좋아하고 마음이 어질었다.
이렇듯 마음이 잘 맞는 누나였지만, 그 누나도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다. 이후로 소년은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 독서에만 열중했다. 소년은 큰형처럼 놀이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격구나 사냥을 즐기지도 않았다. 즐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잘 놀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소년은 몸이 뚱뚱하고 운동이나 잡기에는 소질이 없었다. 그나마 소년이 가장 잘하는 것이 독서였고, 좋아하는 것이 공부였다. 거기다 부모의 눈 밖에 나는 행동이나 궁궐 법도에 어긋난 일은 하지 못하는 타고난 범생이였다. 궁궐에서 그런 범생이 왕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공부하고 또 공부하는 일밖에 없었다.
하지만 범생이 소년의 궁궐살이도 결혼과 함께 끝이 났다. 이제 궁궐 밖에서 스스로 집안을 돌보며 생활해야 했다. 그렇게 12세의 어린 소년 도의 독립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 책벌레 충녕의 학문적 깊이
‘일찍이 여러 달 동안 편치 않았는데도 독서를 그치지 아니하니, 태종이 근심하여 서적을 거두어 감추도록 명하였는데, 사이에 한 책이 남아 있어 날마다 외우기를 마지않으니, 대개 천성이 이와 같았다.’
이는 세종이 별세한 뒤, 신하들이 지은 추도문에 나오는 내용인데,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세종은 책벌레였다. 말하자면 공부를 좋아했다는 것인데 태종도 그 점을 높이 평가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아, 비록 몹시 춥고 더운 날씨라도 밤을 새워 글을 읽는다.”
이런 충녕의 뛰어난 학문은 큰형 양녕에겐 되레 고통이 되기도 했다. 태종 16년 7월 18일에 태종과 상왕(정종)이 경회루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세자와 종친들이 대거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대신들이 글귀를 이어가던 중에 “노성(老成, 노숙함을 이루다)한 사람을 버릴 수 없다”는 문장이 나오자, 충녕대군이 말했다.
“서(書)에 이르기를 ‘기수준재궐복(耆壽俊在厥服)’이라 했습니다.”
‘서경’에 있는 이 말을 풀이하자면, ‘노숙하고 뛰어난 사람들이 해당되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태종이 이 말을 듣고 충녕의 학문 수준에 감탄하더니 세자를 돌아보며 꾸짖었다.
“너는 어째서 학문이 이렇지 못하느냐?”
이렇듯 충녕의 학문은 만인의 칭송을 얻었지만, 그와 대비되는 양녕은 늘 욕을 먹는 처지였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충녕의 학문적 깊이를 가늠하게 하는 기록이 ‘태종실록’ 18년 1월 26일에 보인다.
성녕대군 이종이 완두창이 나서 병이 위독하자 청성군 정탁이 태종을 안심시키기 위해 ‘주역’으로 점을 쳐 왕에게 올렸는데, 충녕대군이 이를 정확하게 풀이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신하들은 물론이고, 세자 양녕까지 감복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충녕은 주역에도 정통했다는 뜻인데, 당시 학자들 가운데 주역에 정통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충녕의 학문적 깊이와 넓이는 당대 어느 누구와 견줘도 손색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작가
■ 용어설명 - 완두창 (豌豆瘡)
완두콩 모양으로 나는 종기를 말하며, 흔히 두창이라고 불렀다. 원래 한의학에서 ‘창(瘡)’이라는 것은 부스럼이나 종기 또는 발진성 전염병을 통칭하는데, 홍역이나 천연두도 그 일종으로 보았다. 성녕대군 이종이 걸린 완두창은 홍역을 지칭한다. 지금은 홍역이 2급 전염병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홍역이 돌면 거리에 인적이 끊길 정도의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숙종 시절엔 홍역이 전국에 유행해 1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낳기도 했다.
# 꼬마신랑이 된 범생이 왕자
1408년(태종 8년) 2월 16일 궁중에서 어린 소년 하나가 결혼식을 올렸다. 소년은 1397년생이니 나이는 12살, 지금으로 보면 겨우 초등학교 5학년 나이였다. 그야말로 꼬마신랑이었다. 그 어린 소년이 두 살 많은 14세 소녀에게 장가를 든 것이다. 이 소년의 이름은 도였고, 군호는 충녕으로 훗날의 세종이었다. 신부가 된 소녀는 당시 우부대언(우부승지) 심온의 딸로 곧 소헌왕후 심씨였다.
소년은 위로 세 명의 누나와 두 명의 형이 있었다. 그리고 아래로는 오션파라다이스릴게임 남동생 하나와 여동생 하나가 있었다. 그들 외에도 여러 명의 이복형제들이 있었다. 누나와 형들도 모두 어린 나이에 시집가고 장가들었다. 큰누나(정순공주)는 소년보다 열두 살이 많았고, 둘째 누나(경정공주)는 열 살이 많았다. 두 명의 누나는 소년이 아주 어렸을 때 이미 시집을 간 상태였다. 두 명의 누나 아래로 세 명의 형들이 태어났지만 모두 일찍 죽었다 릴게임꽁머니 . 그리고 셋째 누나(경안공주)가 태어났다. 셋째 누나는 소년보다 네 살 많았다. 셋째 누나 다음에 연년생으로 큰형 제(양녕대군)가 태어났다. 큰형은 소년보다 세 살 위였다. 큰형은 부왕 이방원이 왕위에 올랐을 때 일곱 살이었고, 아홉 살에 원자에 책봉되어 열한 살에 왕세자가 됐다. 그리고 14세에 장가들었다. 그러니까 소년보다 한 해 먼저 결혼하여 세자빈 릴게임갓 을 맞아들였던 것이다. 큰형에 이어 둘째 형도 그 해에 열두 살의 나이로 결혼했다. 둘째 형의 이름은 보였고, 군호는 효령이었다. 소년과는 연년생이었고, 16개월 먼저 태어났다. 그렇듯 큰형과 둘째 형이 몇 달 상간으로 결혼하였고, 이제 소년의 차례였던 것이다.
큰형은 결혼 뒤에도 왕세자였기 때문에 궁궐에 남았지만, 둘째 형 보와 소년 도 야마토게임장 는 궁궐을 떠나야 했다. 사실 그들을 빨리 결혼시킨 것은 궁궐에서 내보내기 위함이었다. 12세 소년이면 이제 막 이성에게 관심을 기울일 나이이기에 혹 궁녀들과 염문이라도 돌까 두려워 서둘러서 장가보낸 것이다. 궁녀는 모두 왕의 여자들이다. 말하자면 아버지의 여자들이었던 것인데, 그들 아버지의 여자들과 아들에 대한 염문이 도는 것은 큰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 황금성릴게임 이다. 그래서 소년과 소년의 둘째 형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품을 떠나 궁 밖에서 살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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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째서 학문이 이렇지 못하느냐?”
이렇듯 충녕의 학문은 만인의 칭송을 얻었지만, 그와 대비되는 양녕은 늘 욕을 먹는 처지였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충녕의 학문적 깊이를 가늠하게 하는 기록이 ‘태종실록’ 18년 1월 26일에 보인다.
성녕대군 이종이 완두창이 나서 병이 위독하자 청성군 정탁이 태종을 안심시키기 위해 ‘주역’으로 점을 쳐 왕에게 올렸는데, 충녕대군이 이를 정확하게 풀이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신하들은 물론이고, 세자 양녕까지 감복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충녕은 주역에도 정통했다는 뜻인데, 당시 학자들 가운데 주역에 정통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충녕의 학문적 깊이와 넓이는 당대 어느 누구와 견줘도 손색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작가
■ 용어설명 - 완두창 (豌豆瘡)
완두콩 모양으로 나는 종기를 말하며, 흔히 두창이라고 불렀다. 원래 한의학에서 ‘창(瘡)’이라는 것은 부스럼이나 종기 또는 발진성 전염병을 통칭하는데, 홍역이나 천연두도 그 일종으로 보았다. 성녕대군 이종이 걸린 완두창은 홍역을 지칭한다. 지금은 홍역이 2급 전염병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홍역이 돌면 거리에 인적이 끊길 정도의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숙종 시절엔 홍역이 전국에 유행해 1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낳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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