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텐드라가 모든 남성에게 효과가 있는 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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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반성규수 작성일25-11-20 14:38 조회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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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텐드라가 모든 남성에게 효과가 있는 건 아닙니다
현대 사회에서 발기부전ED은 더 이상 금기시되는 주제가 아닙니다. 다양한 원인과 상황으로 인해 많은 남성이 이 문제를 겪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약물이 개발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스텐드라Stendra는 발기부전 치료제 중 하나로, 빠른 작용 시간과 비교적 적은 부작용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약물이 그렇듯, 스텐드라가 모든 남성에게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글에서는 스텐드라의 작용 원리, 효과를 제한하는 요인들, 그리고 대안을 탐구해 보겠습니다.
1. 스텐드라란 무엇인가?
스텐드라는 아바나필Avanafil을 주성분으로 하는 발기부전 치료제입니다. 이 약물은 PDE5포스포디에스테라제 5형 억제제 계열에 속하며, 음경 내 혈류를 증가시켜 발기를 유도합니다. 스텐드라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1. 빠른 작용 시간
스텐드라는 복용 후 약 15~30분 내에 효과가 나타나며, 다른 PDE5 억제제보다 빠르게 작용합니다. 이는 즉각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남성들에게 적합합니다.
1.2. 비교적 적은 부작용
스텐드라는 두통, 얼굴 홍조, 코막힘과 같은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지만, 대체로 경미한 수준입니다. 또한, 타 PDE5 억제제와 비교했을 때 위장 장애나 시각적 부작용이 적은 편입니다.
1.3. 약효 지속 시간
스텐드라의 효과는 복용 후 약 6시간까지 지속되며, 사용자는 이 시간 내에 자연스러운 성적 자극을 통해 발기를 유도할 수 있습니다.
2. 스텐드라가 모든 남성에게 효과가 없는 이유
스텐드라는 효과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약물로 알려져 있지만, 모든 남성에게 동일한 결과를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다음은 스텐드라의 효과를 제한할 수 있는 주요 요인들입니다.
2.1. 기저 건강 상태
심혈관계 질환: 발기부전은 종종 심혈관계 질환의 초기 신호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심각한 심혈관계 질환을 가진 남성은 스텐드라 사용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환자들은 약물이 혈압에 미치는 영향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뇨병: 당뇨병 환자 중 일부는 신경 손상이나 혈관 문제로 인해 발기부전 치료제의 효과를 충분히 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호르몬 불균형: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낮은 남성은 PDE5 억제제의 효과를 느끼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 경우, 호르몬 대체 요법과 병행 치료가 필요합니다.
2.2. 심리적 요인
발기부전은 신체적 문제뿐만 아니라 심리적 요인에 의해서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 우울증, 불안감 등은 약물의 효과를 감소시키는 주요 요인입니다. 스텐드라는 혈류를 증가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심리적 원인으로 인한 발기부전을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2.3. 약물 상호작용
스텐드라는 특정 약물과 함께 복용할 경우 효과가 감소하거나 부작용 위험이 증가할 수 있습니다.
질산염 제제: 협심증 치료에 사용되는 질산염 제제와 스텐드라를 병용하면 혈압이 위험할 정도로 낮아질 수 있습니다.
항고혈압제: 일부 고혈압 약물과 스텐드라의 병용은 혈압 강하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기타 PDE5 억제제: 여러 발기부전 치료제를 동시에 복용하는 것은 권장되지 않습니다.
2.4. 부적절한 복용 방법
스텐드라의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경우 중 일부는 올바르지 않은 복용 방법 때문일 수 있습니다.
성적 자극 부족: 스텐드라는 성적 자극이 있어야만 효과를 발휘합니다. 따라서 단순히 약물을 복용한다고 해서 발기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음주와의 관계: 과도한 음주는 스텐드라의 효과를 저하시킬 수 있습니다. 알코올은 중추 신경계를 억제하고, 혈류를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3. 스텐드라를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의 대안
스텐드라가 효과적이지 않거나 사용이 제한될 경우, 다른 치료 옵션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3.1. 생활 습관 개선
운동: 규칙적인 유산소 운동은 혈액 순환을 개선하고 발기부전의 원인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식단 관리: 혈관 건강에 좋은 음식을 섭취하면 자연스럽게 발기 능력을 개선할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 관리: 심리적 요인을 해결하기 위해 명상, 상담 치료 등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3.2. 다른 약물 선택
비아그라Viagra: 스텐드라와 유사한 PDE5 억제제로, 더 오래된 약물이지만 여전히 효과적입니다.
시알리스Cialis: 긴 효과 지속 시간최대 36시간으로 유명하며, 특정 상황에서 더 적합할 수 있습니다.
레비트라Levitra: 심혈관계 문제가 있는 환자에게 상대적으로 안전한 옵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3. 비약물 치료
음경 주사 요법: 음경에 직접 혈관 확장제를 주사하여 발기를 유도합니다.
진공 장치: 음경에 진공을 생성해 혈류를 증가시키는 기구입니다.
심리 상담: 발기부전이 심리적 원인에서 기인한 경우,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4. 스텐드라 사용 시 유의사항
스텐드라를 사용할 때는 다음 사항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의사의 처방 필수: 스텐드라는 전문의의 처방이 필요한 약물입니다.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평가받고 적합한 용량을 처방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적정 복용량 준수: 과도한 복용은 부작용을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권장 용량을 초과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정기적인 건강 점검: 발기부전은 종종 다른 질병의 징후일 수 있으므로 정기적인 건강 점검이 필요합니다.
결론
스텐드라는 발기부전 치료제 중 하나로, 많은 남성에게 효과적인 솔루션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으며, 기저 질환, 심리적 요인, 복용 방법 등에 따라 효과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스텐드라가 효과가 없을 경우, 생활 습관 개선, 대체 약물, 비약물 치료 등을 고려해볼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이해하고 전문가와 상의하는 것입니다. 스텐드라가 사랑과 자신감을 되찾는 데 기여하길 바랍니다.
기자 admin@slotmega.info
편집자주
일상이 된 여행. 이한호 한국일보 여행 담당 기자가 일상에 영감을 주는 요즘 여행을 소개합니다.
국내에 남은 대표적 적산가옥인 전북 군산시 신흥동 일본식 가옥이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 있다.
역사의 아픔을 숨기지 않고 정면에 내세운 도시가 있다. ‘시간 여행 마을’로도 불린다. 일제강점 당시 일제의 수탈이 가장 심했던 전북 군산이다. 역사 관광 개발 사업 초기만 해도 제국주의 릴게임손오공 미화 논란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크투어리즘(역사적 비극이나 재난 현장을 찾아가는 관광) 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100년 이상 된 건축물과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군산에서 역사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여행을 소개한다.
100년 넘은 일제 침탈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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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건축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4층으로 지어졌지만 실질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면적은 1층이 대부분이었다.
바다신릴게임
군산의 역사는 금강 하구 옛 군산항(내항)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내항에서 동쪽으로 약 8㎞ 떨어진 월명산까지 이어지는 지역에 일제강점 당시 세관, 은행, 관사 등 주요 기관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현재는 호남관세박물관(구 군산세관 본관)부터 근대건축관(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등 국가등록문화유산 4곳을 비롯해 주목할 만한 역사 관 야마토게임장 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1923년 지어진 근대건축관은 1953년까지 조선은행 군산지점이었다. 당시 한반도 최대 곡창지대 호남평야의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던 군산항의 수익금과 일대 농지 매입 자금을 관리했다. 일제강점기 침탈적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대표 은행으로 꼽힌다. 지점이 위치한 내항 지역의 법정동은 장미동(藏米洞)인데 ‘쌀 곳간’을 뜻한 릴게임바다신2 다. 1953~1980년까지 한일은행(우리은행의 전신) 군산지점으로 사용되다 민간에 매각돼 유흥주점인 나이트클럽 간판을 단 역사도 있다. 1990년대 화재 피해를 입기도 했다. 2008년 국가등록문화유산에 등재된 후 2013년에서야 복원됐다.
100년 건축물이 즐비한 군산에서도 건축관으로 낙점된 만큼 내·외관이 웅장하다. 실제 층수는 2층에 불과하지만 통상 4층 건물의 높이로 지어졌다. 건립 당시 군산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고 한다. 외부의 황각석으로 장식한 기단과 현관, 급한 경사의 높은 지붕 등이 중앙은행의 권위를 드러낸다.
내부는 2층 중앙을 뻥 뚫어 개방감을 극대화했다. 높은 층고는 당시 공간의 기능보다 은행의 권위와 위상을 중시했던 상징성을 보여준다. 서울 한국은행 본관(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을 제외하면 유일한 조선은행 관련 문화유산이다. 지금은 사진으로만 남은 서울 중구 소공동 옛 상업은행 본점과 외형이 유사하다.
근대미술관으로 탈바꿈한 구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
제18은행 군산지점은 긴 세월 동안 구조가 변경된 것으로 추정된다.
근대건축관에서 해망로를 따라 서쪽으로 100m만 걸으면 옛 은행 건물이 하나 더 있다. 구 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현재는 근대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8은행’은 일본에서 18번째로 설립허가를 받은 은행이라는 뜻이다. 일본 나가사키현을 관장하는 주하치신와은행의 전신이다.
현재의 모습은 준공 당시의 현관과 창 등이 단출하게 바뀐 모습이나, 준공 당시에도 조선은행 건물과는 사뭇 달랐다. 회백색 단층 건물로 지붕의 경사도 평범했다. 제국 정부가 설립한 조선은행과 지역 상인조합이 설립한 제18은행의 차이를 극명하게 나타낸다. 물론 제18은행도 조선인의 농토를 강매하고 쌀을 반출함으로 수익을 냈다. 자본시장에 생소한 조선인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과 쌀을 매개로 한 금융상품을 판매해 담보로 잡힌 토지를 압류하는 방식이었다.
본관 북쪽에는 금고로 쓰인 조적 건물과 직원 휴게공간으로 쓰인 목조 건물 두 동이 함께 있다. 금고를 분리된 건물에 지은 점이 독특하다. 금고 보관 공간에 특별히 신경을 쓴 부분이 눈에 띈다. 본관과 휴게건물은 저렴한 목재로 짓고, 금고만 비싼 조적으로 쌓았다. 1911년 준공돼 조선은행 건물보다도 11년이나 더 됐다. 해방 전인 1938년 대한통운의 전신인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에 매각됐다. 같은 회사가 소유했던 곡물창고(현 장미갤러리·공연장)와 옛 미즈상사 사옥(현 미즈커피)이 인접해 있다.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는 구 군산세관 본관의 모습.
호남관세박물관 내부에 시대별 압류품이 전시돼 있다.
호남관세박물관은 내항 지역의 국가등록문화유산 중 유일한 사적이다. 1908년 준공돼 연식도 가장 오래됐다. 1993년까지 86년 동안 세관 건물이었다. 소유권이 민간에 넘어가 관리가 부실한 시기가 있던 앞선 두 건물과 달리 준공 이래 국가가 계속해서 소유해 보존 상태가 가장 좋다. 일제강점 당시 사용됐던 감시 청사·망루 등 부속 시설은 망실됐으나 본관 자체는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 있다.
한국은행 본관, 서울역사와 함께 국내 대표 서양 고전주의 건물로 꼽힌다. 고딕 양식의 지붕, 로마네스크 양식의 창문, 영국식 처마가 사용됐다. 서양의 건축 양식을 적극 받아들이고자 했던 근대 일본의 건축 동향을 볼 수 있다. 외벽의 붉은 벽돌도 벨기에에서 수입해 지을 정도로 공들인 건물이다. 내부에는 수년에 거쳐 세관이 압류한 밀수품도 전시돼 있어 역사의 흐름을 엿볼 수 있다. 과거 창고로 사용된 건물도 보존돼 있는데, 현재는 민간에 임대해 카페로 사용되고 있다.
군산 내항에 뜬다리 부두(오른쪽)와 위봉함(왼쪽 아래)이 보인다.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중식당 빈해원은 독특한 구조로 이목을 끈다.
내항의 수변에는 장미동의 네 번째 국가등록문화유산인 세 량의 뜬다리 부두(부잔교)가 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군산 앞바다에 선박이 안전하게 접안할 수 있도록 고안한 장치다. 고정된 구조물 형태의 항만은 썰물로 수위가 낮아지면 선박이 정박할 수 없다. 뜬다리 부두는 일종의 바지선을 띄운 후 이를 각도 조절이 가능한 다리로 연결해 수위에 따라 위아래로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한 구조물이다. 수탈한 쌀을 쉽게 하역할 수 있도록 일제 치하 1926년에서 1938년까지 사용됐다. 부두 옆에 2차 대전과 월남전에 투입된 상륙함 위봉함(LST-676) 등 해양군사 무기도 전시돼 있다.
역사가 담긴 중화요리 전문점 건물도 눈길을 끈다. 음식점으로는 드물게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1950년대 초 화교인 왕근석씨가 창업해 대를 이어온 음식점으로 근대 군산에 정착했던 화교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건물 정면은 평범하지만 들어가면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내부는 1, 2층이 개방돼 있다. 홀 양측으로 작은 방이 도열해 있고, 홀에는 대형 원탁이 여럿 놓여 있다. 천장에 달린 중국풍 조명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완성한다. 최초 준공 이후 여러 번 증축을 거쳐 지금의 특색 있는 모습이 됐다.
수탈을 위해 일본 지주가 지은 가옥
신흥동 일본식 가옥이 거대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 내부 정원은 밀도 있게 꾸며져 있다.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적산가옥도 군산에 있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히로쓰 가옥)’은 영화 ‘타짜’의 주인공 ‘고니’의 스승 ‘평경장’의 자택으로 유명하다. 이 가옥은 군산 일대의 대지주이자 미곡상이었던 히로쓰 기치사부로의 자택으로 알려져 있다. 1925~1935년 사이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 후 고 이용구 호남제분 창업주에게 팔렸다가 호남제분의 후신인 한국제분이 이후 관리했다. 사조그룹에 기업을 매각한 후에도 이 가옥만큼은 창업주 일가가 계속해서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5년 이후 내부는 개방되지 않지만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1층 내부는 제한적으로 관람할 수 있다. 외부와 정원은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주택 규모가 크고 원형이 잘 보존돼 있어 당시 일본인 상류층의 생활 양식을 보여주는 유산이다. 2층이 무려 12개실로 구성된 대저택이다. 전체적으로 일본 고급 목조주택(야시키)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일부 방은 한국의 기후에 맞게 온돌 난방이 설치돼 있다.
‘ㄱ’ 자 형태의 건물 사이 조성된 정원은 석탑과 조경수로 빼곡히 꾸며져 있다. 돌길과 연못까지 갖춰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호남제분 일가가 퇴거하고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돼 관리받기 전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이 오랜 역사를 드러낸다.
군산항쟁관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군산항쟁관 내부는 박물관으로 개조됐지만 일본식 가옥 특유의 좁은 복도 등 옛 구조를 간직하고 있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에서 300m 떨어진 월명동 군산항쟁관도 역사 속 아픔을 배울 수 있도록 조성된 공간이다. 100여 년 된 적산가옥을 독립운동기념관으로 만들었다. 서울에서 3·1운동이 발생하고 나흘 뒤 군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이 한강 이남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이라는 점을 기리기 위한 공간이다. 신흥동 가옥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내부를 직접 걸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군산 월명동 일대에는 현재도 적산가옥 100여 채가 남아 있다고 하지만 대부분 개인 소유라 내부 관람은 제한돼 있다.
동국사는 일본 사찰 특유의 높고 깊은 경사의 지붕이 얹혀 있다.
동국사의 종각에 일본 교토에서 주조한 범종이 걸려 있다.
군산항쟁관에서 남쪽으로 200m만 내려가면 동국사가 보인다. 일제강점기 당시 지어진 일본식 사찰 500여 곳 중 드물게 현재까지 사찰로 사용되는 곳이다. 1909년 금강선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돼 1913년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상징적인 대웅전은 1932년에 준공됐다. 1955년 불교전북교당에서 인수해 현재 이름인 동국사로 개칭했다. ‘해동 대한민국’에서 ‘동국’을 따와 ‘우리나라의 절’이라는 뜻이다. 15년 후 대한불교조계종에 증여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의 높고 가파른 경사의 지붕이 한눈에 봐도 일본식 건축물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정방형 단층 팔(八)자 지붕 홑처마를 얹은 에도시대 양식이다. 외벽에는 일본식 미세기(문 두 짝을 한편으로 밀어 겹치게 여닫는)문이 여럿 나 있다. 실내 복도로 승려들의 거처인 요사채와 연결돼 있다. 건축에 쓰인 목재는 전부 일본산 적삼목(삼나무)이다. 대웅전에 1650년(효종 1년)에 제작된 소조여래삼존상(보물)이 봉안돼 있다. 본래 전북 김제시 금산사 대장전에 봉안돼 있던 것을 1950년대에 옮겨왔다.
마당의 범종은 1919년 일본 교토에서 주조해 공수했다. 2010년대에 금강선사를 세운 일본 조동종의 주도로 일제의 잘못을 참회하는 ‘참사비’와 시민 성금으로 세운 소녀상이 들어섰다.
철길마을과 초원사진관... 레트로 성지 군산
경암동 철길마을은 레트로 여행지로 인기가 높다.
철길 양옆으로 상인들의 물건이 잔뜩 쌓여 있는 가운데 관광객이 교복을 입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군산은 옛 추억을 상기하는 '레트로' 여행으로도 제격이다. 일제강점기 못지않게 산업화 시대의 흔적이 많이 남은 군산은 1970~1980년대를 테마로 한 공간이 많다. 철길과 시장, 옛 문방구와 과자점, 사진관 등이 도시 곳곳에 숨겨져 있다.
경암동 철길마을이 대표적이다. 제지공장과 군산역을 연결하는 2.5㎞의 철도를 따라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이 기원이다. 철도가 개통한 1944년부터 건물이 하나둘 들어서다 197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됐다.
2000년대 들어 제지공장이 이전한 뒤 열차 운행이 멈추면서 마을 풍경도 달라졌다. 이전에는 마을 주민들이 철로에 고추 등을 말리다 열차가 접근하면 황급히 걷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철로 주위로 빼곡히 지어진 건물과 열차 운행에 맞춰 움직이는 생활 양식이 마치 철길 마을로 유명한 베트남 하노이를 연상시킨다.
각기 다른 연령대의 관광객이 모두 교복을 입고 철길 마을을 즐기고 있다.
현재는 대부분 주택이 추억 상품을 판매하는 상점으로 탈바꿈했다. 교복을 빌려 사진을 남기거나 달고나와 같은 추억의 간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공간들이다. 중장년에겐 추억 돋는 여행이 되고, 젊은 세대들은 이색적인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 상업화되기 전 마을의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관광지로 조성된 구역을 넘어 철길을 따라 걸으면 된다. 점차 인적이 줄어들며 여유롭게 철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 밖에 1998년 개봉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배경인 ‘초원사진관’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다. 영화 촬영을 위해 조성한 ‘가상의 사진관’이지만 따뜻한 감성을 느낄 수 있는 군산 시간 여행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다.
경암동 철길마을에서 조금 벗어난 옛 철도 구간.
군산=글·사진 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
일상이 된 여행. 이한호 한국일보 여행 담당 기자가 일상에 영감을 주는 요즘 여행을 소개합니다.
국내에 남은 대표적 적산가옥인 전북 군산시 신흥동 일본식 가옥이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 있다.
역사의 아픔을 숨기지 않고 정면에 내세운 도시가 있다. ‘시간 여행 마을’로도 불린다. 일제강점 당시 일제의 수탈이 가장 심했던 전북 군산이다. 역사 관광 개발 사업 초기만 해도 제국주의 릴게임손오공 미화 논란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크투어리즘(역사적 비극이나 재난 현장을 찾아가는 관광) 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100년 이상 된 건축물과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군산에서 역사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여행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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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건축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4층으로 지어졌지만 실질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면적은 1층이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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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의 역사는 금강 하구 옛 군산항(내항)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내항에서 동쪽으로 약 8㎞ 떨어진 월명산까지 이어지는 지역에 일제강점 당시 세관, 은행, 관사 등 주요 기관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현재는 호남관세박물관(구 군산세관 본관)부터 근대건축관(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등 국가등록문화유산 4곳을 비롯해 주목할 만한 역사 관 야마토게임장 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1923년 지어진 근대건축관은 1953년까지 조선은행 군산지점이었다. 당시 한반도 최대 곡창지대 호남평야의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던 군산항의 수익금과 일대 농지 매입 자금을 관리했다. 일제강점기 침탈적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대표 은행으로 꼽힌다. 지점이 위치한 내항 지역의 법정동은 장미동(藏米洞)인데 ‘쌀 곳간’을 뜻한 릴게임바다신2 다. 1953~1980년까지 한일은행(우리은행의 전신) 군산지점으로 사용되다 민간에 매각돼 유흥주점인 나이트클럽 간판을 단 역사도 있다. 1990년대 화재 피해를 입기도 했다. 2008년 국가등록문화유산에 등재된 후 2013년에서야 복원됐다.
100년 건축물이 즐비한 군산에서도 건축관으로 낙점된 만큼 내·외관이 웅장하다. 실제 층수는 2층에 불과하지만 통상 4층 건물의 높이로 지어졌다. 건립 당시 군산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고 한다. 외부의 황각석으로 장식한 기단과 현관, 급한 경사의 높은 지붕 등이 중앙은행의 권위를 드러낸다.
내부는 2층 중앙을 뻥 뚫어 개방감을 극대화했다. 높은 층고는 당시 공간의 기능보다 은행의 권위와 위상을 중시했던 상징성을 보여준다. 서울 한국은행 본관(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을 제외하면 유일한 조선은행 관련 문화유산이다. 지금은 사진으로만 남은 서울 중구 소공동 옛 상업은행 본점과 외형이 유사하다.
근대미술관으로 탈바꿈한 구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
제18은행 군산지점은 긴 세월 동안 구조가 변경된 것으로 추정된다.
근대건축관에서 해망로를 따라 서쪽으로 100m만 걸으면 옛 은행 건물이 하나 더 있다. 구 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현재는 근대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8은행’은 일본에서 18번째로 설립허가를 받은 은행이라는 뜻이다. 일본 나가사키현을 관장하는 주하치신와은행의 전신이다.
현재의 모습은 준공 당시의 현관과 창 등이 단출하게 바뀐 모습이나, 준공 당시에도 조선은행 건물과는 사뭇 달랐다. 회백색 단층 건물로 지붕의 경사도 평범했다. 제국 정부가 설립한 조선은행과 지역 상인조합이 설립한 제18은행의 차이를 극명하게 나타낸다. 물론 제18은행도 조선인의 농토를 강매하고 쌀을 반출함으로 수익을 냈다. 자본시장에 생소한 조선인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과 쌀을 매개로 한 금융상품을 판매해 담보로 잡힌 토지를 압류하는 방식이었다.
본관 북쪽에는 금고로 쓰인 조적 건물과 직원 휴게공간으로 쓰인 목조 건물 두 동이 함께 있다. 금고를 분리된 건물에 지은 점이 독특하다. 금고 보관 공간에 특별히 신경을 쓴 부분이 눈에 띈다. 본관과 휴게건물은 저렴한 목재로 짓고, 금고만 비싼 조적으로 쌓았다. 1911년 준공돼 조선은행 건물보다도 11년이나 더 됐다. 해방 전인 1938년 대한통운의 전신인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에 매각됐다. 같은 회사가 소유했던 곡물창고(현 장미갤러리·공연장)와 옛 미즈상사 사옥(현 미즈커피)이 인접해 있다.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는 구 군산세관 본관의 모습.
호남관세박물관 내부에 시대별 압류품이 전시돼 있다.
호남관세박물관은 내항 지역의 국가등록문화유산 중 유일한 사적이다. 1908년 준공돼 연식도 가장 오래됐다. 1993년까지 86년 동안 세관 건물이었다. 소유권이 민간에 넘어가 관리가 부실한 시기가 있던 앞선 두 건물과 달리 준공 이래 국가가 계속해서 소유해 보존 상태가 가장 좋다. 일제강점 당시 사용됐던 감시 청사·망루 등 부속 시설은 망실됐으나 본관 자체는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 있다.
한국은행 본관, 서울역사와 함께 국내 대표 서양 고전주의 건물로 꼽힌다. 고딕 양식의 지붕, 로마네스크 양식의 창문, 영국식 처마가 사용됐다. 서양의 건축 양식을 적극 받아들이고자 했던 근대 일본의 건축 동향을 볼 수 있다. 외벽의 붉은 벽돌도 벨기에에서 수입해 지을 정도로 공들인 건물이다. 내부에는 수년에 거쳐 세관이 압류한 밀수품도 전시돼 있어 역사의 흐름을 엿볼 수 있다. 과거 창고로 사용된 건물도 보존돼 있는데, 현재는 민간에 임대해 카페로 사용되고 있다.
군산 내항에 뜬다리 부두(오른쪽)와 위봉함(왼쪽 아래)이 보인다.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중식당 빈해원은 독특한 구조로 이목을 끈다.
내항의 수변에는 장미동의 네 번째 국가등록문화유산인 세 량의 뜬다리 부두(부잔교)가 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군산 앞바다에 선박이 안전하게 접안할 수 있도록 고안한 장치다. 고정된 구조물 형태의 항만은 썰물로 수위가 낮아지면 선박이 정박할 수 없다. 뜬다리 부두는 일종의 바지선을 띄운 후 이를 각도 조절이 가능한 다리로 연결해 수위에 따라 위아래로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한 구조물이다. 수탈한 쌀을 쉽게 하역할 수 있도록 일제 치하 1926년에서 1938년까지 사용됐다. 부두 옆에 2차 대전과 월남전에 투입된 상륙함 위봉함(LST-676) 등 해양군사 무기도 전시돼 있다.
역사가 담긴 중화요리 전문점 건물도 눈길을 끈다. 음식점으로는 드물게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1950년대 초 화교인 왕근석씨가 창업해 대를 이어온 음식점으로 근대 군산에 정착했던 화교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건물 정면은 평범하지만 들어가면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내부는 1, 2층이 개방돼 있다. 홀 양측으로 작은 방이 도열해 있고, 홀에는 대형 원탁이 여럿 놓여 있다. 천장에 달린 중국풍 조명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완성한다. 최초 준공 이후 여러 번 증축을 거쳐 지금의 특색 있는 모습이 됐다.
수탈을 위해 일본 지주가 지은 가옥
신흥동 일본식 가옥이 거대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 내부 정원은 밀도 있게 꾸며져 있다.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적산가옥도 군산에 있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히로쓰 가옥)’은 영화 ‘타짜’의 주인공 ‘고니’의 스승 ‘평경장’의 자택으로 유명하다. 이 가옥은 군산 일대의 대지주이자 미곡상이었던 히로쓰 기치사부로의 자택으로 알려져 있다. 1925~1935년 사이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 후 고 이용구 호남제분 창업주에게 팔렸다가 호남제분의 후신인 한국제분이 이후 관리했다. 사조그룹에 기업을 매각한 후에도 이 가옥만큼은 창업주 일가가 계속해서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5년 이후 내부는 개방되지 않지만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1층 내부는 제한적으로 관람할 수 있다. 외부와 정원은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주택 규모가 크고 원형이 잘 보존돼 있어 당시 일본인 상류층의 생활 양식을 보여주는 유산이다. 2층이 무려 12개실로 구성된 대저택이다. 전체적으로 일본 고급 목조주택(야시키)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일부 방은 한국의 기후에 맞게 온돌 난방이 설치돼 있다.
‘ㄱ’ 자 형태의 건물 사이 조성된 정원은 석탑과 조경수로 빼곡히 꾸며져 있다. 돌길과 연못까지 갖춰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호남제분 일가가 퇴거하고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돼 관리받기 전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이 오랜 역사를 드러낸다.
군산항쟁관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군산항쟁관 내부는 박물관으로 개조됐지만 일본식 가옥 특유의 좁은 복도 등 옛 구조를 간직하고 있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에서 300m 떨어진 월명동 군산항쟁관도 역사 속 아픔을 배울 수 있도록 조성된 공간이다. 100여 년 된 적산가옥을 독립운동기념관으로 만들었다. 서울에서 3·1운동이 발생하고 나흘 뒤 군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이 한강 이남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이라는 점을 기리기 위한 공간이다. 신흥동 가옥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내부를 직접 걸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군산 월명동 일대에는 현재도 적산가옥 100여 채가 남아 있다고 하지만 대부분 개인 소유라 내부 관람은 제한돼 있다.
동국사는 일본 사찰 특유의 높고 깊은 경사의 지붕이 얹혀 있다.
동국사의 종각에 일본 교토에서 주조한 범종이 걸려 있다.
군산항쟁관에서 남쪽으로 200m만 내려가면 동국사가 보인다. 일제강점기 당시 지어진 일본식 사찰 500여 곳 중 드물게 현재까지 사찰로 사용되는 곳이다. 1909년 금강선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돼 1913년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상징적인 대웅전은 1932년에 준공됐다. 1955년 불교전북교당에서 인수해 현재 이름인 동국사로 개칭했다. ‘해동 대한민국’에서 ‘동국’을 따와 ‘우리나라의 절’이라는 뜻이다. 15년 후 대한불교조계종에 증여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의 높고 가파른 경사의 지붕이 한눈에 봐도 일본식 건축물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정방형 단층 팔(八)자 지붕 홑처마를 얹은 에도시대 양식이다. 외벽에는 일본식 미세기(문 두 짝을 한편으로 밀어 겹치게 여닫는)문이 여럿 나 있다. 실내 복도로 승려들의 거처인 요사채와 연결돼 있다. 건축에 쓰인 목재는 전부 일본산 적삼목(삼나무)이다. 대웅전에 1650년(효종 1년)에 제작된 소조여래삼존상(보물)이 봉안돼 있다. 본래 전북 김제시 금산사 대장전에 봉안돼 있던 것을 1950년대에 옮겨왔다.
마당의 범종은 1919년 일본 교토에서 주조해 공수했다. 2010년대에 금강선사를 세운 일본 조동종의 주도로 일제의 잘못을 참회하는 ‘참사비’와 시민 성금으로 세운 소녀상이 들어섰다.
철길마을과 초원사진관... 레트로 성지 군산
경암동 철길마을은 레트로 여행지로 인기가 높다.
철길 양옆으로 상인들의 물건이 잔뜩 쌓여 있는 가운데 관광객이 교복을 입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군산은 옛 추억을 상기하는 '레트로' 여행으로도 제격이다. 일제강점기 못지않게 산업화 시대의 흔적이 많이 남은 군산은 1970~1980년대를 테마로 한 공간이 많다. 철길과 시장, 옛 문방구와 과자점, 사진관 등이 도시 곳곳에 숨겨져 있다.
경암동 철길마을이 대표적이다. 제지공장과 군산역을 연결하는 2.5㎞의 철도를 따라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이 기원이다. 철도가 개통한 1944년부터 건물이 하나둘 들어서다 197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됐다.
2000년대 들어 제지공장이 이전한 뒤 열차 운행이 멈추면서 마을 풍경도 달라졌다. 이전에는 마을 주민들이 철로에 고추 등을 말리다 열차가 접근하면 황급히 걷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철로 주위로 빼곡히 지어진 건물과 열차 운행에 맞춰 움직이는 생활 양식이 마치 철길 마을로 유명한 베트남 하노이를 연상시킨다.
각기 다른 연령대의 관광객이 모두 교복을 입고 철길 마을을 즐기고 있다.
현재는 대부분 주택이 추억 상품을 판매하는 상점으로 탈바꿈했다. 교복을 빌려 사진을 남기거나 달고나와 같은 추억의 간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공간들이다. 중장년에겐 추억 돋는 여행이 되고, 젊은 세대들은 이색적인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 상업화되기 전 마을의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관광지로 조성된 구역을 넘어 철길을 따라 걸으면 된다. 점차 인적이 줄어들며 여유롭게 철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 밖에 1998년 개봉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배경인 ‘초원사진관’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다. 영화 촬영을 위해 조성한 ‘가상의 사진관’이지만 따뜻한 감성을 느낄 수 있는 군산 시간 여행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다.
경암동 철길마을에서 조금 벗어난 옛 철도 구간.
군산=글·사진 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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