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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slotnara.info- ‘망암’이란 호를 짓다
임진왜란 당시 해전에 거북선이 있었다면, 육전에는 변이중이 만든 화차가 있었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권율의 행주대첩은 바로 변이중의 화차가 결정적 승리 요인이었다.
화차를 만든 변이중(邊以中, 1546-1611)은 장성군 장성읍 장안리에서 참봉을 지낸 변택과 함풍이씨 사이에서 태어난다. 자는 언시(彦時), 호는 망암(望庵), 본관은 황주(黃州)이다.
그의 호 망암은 ‘효’와 관련해서 지어진다. 1576년(선조 9)에 부친이, 이듬해에는 모친이 연이어 사망한 릴게임모바일 다. 변이중은 너무 슬퍼한 나머지 생명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상중에 지켜야 하는 예절은 ‘주자가례’를 따랐다. 부모 묘소 아래에 작은 초막을 짓고 묘를 바라보면서 목 놓아 슬피 울곤 하였다. ‘망암’은 “초막에서 부모의 묘를 바라본다”라는 뜻을 담아 스스로 지은 것이다.
변이중은 13살 때부터 3년간 장성군 진원면에 거주하던 청계 박원순 릴게임하는법 에게 학문을 배운다. 박원순은 생원이 됐지만, 과거를 포기한 채 학문에만 힘쓴 재야의 선비였다. 이후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글과 학문을 수학한다. 1568년(선조 1)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3년(선조 6) 문과에 급제했는데,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의 첫 관직은 종9품 교서관 부정자였다. 관직에 나아간 지 3년 만에 부친 릴게임바다이야기 을 잃고, 이듬해에는 모친마저 잃는다.
부모의 3년 상을 마친 후 성균관 박사에 임용되고, 정6품 사헌부 감찰로 승진된 후 성균관 전적, 예조좌랑을 지낸다. 스승인 율곡 이이가 타계하자 가난에 시달리던 가족을 돌봐준 일로 반대파인 동인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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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서원 묘정비
1588년(선조 21) 평안도 도사에 복직된 후 형조좌랑을 거쳐 종4품직인 풍기 군수가 된다. 풍기 군수로 재직 중 권세가의 청탁 때문에 수십 년 동안 판결하지 못하던 송사를 법률에 온라인골드몽 의거, 처리한다. 관찰사까지 나서 재고를 부탁했지만, 판결을 번복하지 않는다. 이 일로 동인의 미움을 받아 1591년(선조 21) 어천(평안도 연변) 찰방으로 좌천된다. 찰방(察訪)은 역참과 역원에 근무하면서 해당 역로와 역마, 통행 등을 관리하던 종6품직으로, 한직이었다. 왜란 발발 20일 만에 한양이 함락되자, 선조는 의주로 몽진(蒙塵)한다. 이때 어천 찰방 변이중은 말 200여 필을 마련, 선조의 파천을 돕는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산부사와 성균관 전적, 비변사 낭청을 지냈고, 마지막 받은 관직은 1603년(선조 36) 받은 함안군수였다. 그는 과거에 급제한 후 내·외직을 역임한 관료였지만, 오늘 변이중을 기억하는 것은 소모사·조도어사·독운사로서의 활동과 화차를 제작, 권율에게 보내 행주대첩에 큰 도움을 준 일 때문이었다.
-소모사·조도어사·독운사가 되다 변이중은 1592년 9월 예조정랑에 임명된다. 그런데 왜적이 전라도로 침입하지 않고 곧바로 북상하자, 동년 10월 전라도 소모사에 임명된다. 소모사(召募使)란 변란이 발발했을 때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국왕이 임시로 임명한 관리를 말한다.
변이중이 파견된 곳은 임진왜란의 화마가 미치지 않았고, 그의 고향이 있는 전라도였다. 변이중은 한 달 만에 수천의 의병과 우거(牛車) 등 군기를 모은 후 의병을 이끌고 수원으로 진군, 경기도 일대의 왜군과 전투를 벌인다.
그는 독성산성 전투 등 몇몇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죽산(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한다. 죽산 전투는 1593년 2월1일자 ‘선조수정실록’에 다음처럼 나온다.
“변이중이 양호(兩湖, 호남과 호서)에서 군사를 소집한 다음, 망령돼 옛 법을 본받아서 우거를 많이 준비해 학익진을 지어 적의 진지에 다다르니, 적들이 칼을 휘두르며 마주나와서 종횡무진 어지럽게 베자, 아군이 패해 흩어졌다. 적이 또 불을 던져 우거를 태우니 우거 위의 군사들이 모두 죽었으며, 변이중은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실록’에 나오는 ‘우거’란 변이중이 제작한 ‘화차’를 말한다. 변이중은 죽산에서 자신이 만든 화차를 투입했지만 패배했고, 이후 화차의 단점을 보완한 다음 행주대첩에서는 대승을 거둔다.
그는 죽산 전투 이후 명군의 식량을 조달하는 조도어사(調度御史)에 임명된다. 이에 변이중은 “대적이 아직 서울에 머물고 있는데, 병사들을 해산시킬 수 없다”며 항의한 후, 친히 정예병을 이끌고 양천에 이르러 수 차례 왜적과 전투를 벌인다.
조정은 군량미 조달이 시급하다며 다시 그에게 조도어사의 임무를 맡긴다. 변이중은 호남으로 내려가 군량미 수 만석을 조달, 명나라 군대에 대준다. 곧바로 그에게 또 내려진 것은 군량미 운반을 감독하는 독운사(督運使)였다. 그가 운반한 곡식은 수십 만석이었고, 곡식들은 전쟁터 군사들의 군량이 된다.
변이중은 임진왜란 당시 소모사에 한 번, 조도어사에 세 번, 독운사에 두 번 임명된다. 병사를 모으고, 곡식을 모으고, 모아진 곡식을 한양으로 운반하는 직책을 수행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변이중이 맡은 직책은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일이었고, 전쟁터에 군사를 징발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소모의 과정에서 백성들과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1593년 2월24일자 ‘선조실록’의 “소모사 변이중은 수레 만들기를 독촉, 백성들에게 소를 바치라고 다그치므로 백성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있다”는 기록도, 그 사례다.
임진왜란은 소모사 변이중과 같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은 헌신과 호남인들의 지원으로 치러진 전쟁이었음을 새삼 확인한다. 전라좌수사 이순신도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고 하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호남은 국가를 지켜낸 울타리다”는 ‘호남국가지보장’(湖南國家之保障)이 그것이다.
임진왜란을 치러내면서 곡창 지대였던 호남은 군량미뿐만 아니라 병력 보충의 근원지였다. 7년 전쟁으로 호남은 매우 지친다. 1597년 1월23일자 ‘선조실록’에 보면 유성룡이 “전라 한 도가 임진년 변란이 일어나던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공(內供, 공물)을 조달하고 경비를 대느라 민력(民力)이 탕갈되어 이산(離散)함이 많을 것입니다”라는 보고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전쟁 기간 피폐해진 ‘민’에 대한 조정의 대책은 없었다. 유성룡은 임금이 글을 내려 위로하고 달래 달라고 청하면서, 인재 등용을 건의하고 있다. 이때 정설과 변이중을 추천한다. 1599년(선조 32), 변이중이 선산부사에 임명된 연유다.
-화차, 행주대첩을 이끌다 망암 변이중 하면 떠오르는 것은 행주대첩의 비밀 병기 화차(火車)다. 변이중의 화차가 행주대첩의 비밀 병기였음은 임진왜란 이후 내내 인구에 회자(膾炙)된다. 임진왜란 발발 400년이 지난 1905년 ‘고종실록’에 “처음으로 화차를 만들어…공(변이중)은 도원수 권율과 함께 군대의 형세를 도왔는데 권율의 행주대첩은 실제로 화차의 위력에 힘입은 것이었다”는 평가도 그 중 하나다.
화차는 ‘화약(무기)을 실은 수레’로, 하나 또는 다수의 화약 무기를 설치해 적에게 발사할 수 있게끔 만든 장비를 말한다. 화차는 당나라 때 처음으로 화약이 개발되면서 등장한다. 우리나라에도 고려말 최무선과 조선 태종대에 만들어진 화차가 있었다. 그러나 가장 유명한 화차는 문종이 직접 설계한 후 동생인 임영대군이 제작한 문종 화차다. 그리고 그 문종 화차의 취약점을 보완한 것이 변이중의 화차였다.
문종 화차는 신기전기나 사전총통으로 화살을 발사하는 곡사화기였지만, 변이중의 화차는 승자총통(勝字銃筒)으로 철환(鐵丸)을 발사하는 직사화기였다. 곡사화기가 직사화기로 바뀌면서 살상력도 증가됐음은 물론이다. 여기에다가 왜군의 조총으로부터 병사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호벽이 있었고, 전면뿐 아닌 좌·우 측면에 승자총통이 장착돼 세 방향의 적을 화차의 이동 없이 공격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변이중 화차의 구조를 더 살펴보자. 전면에 14개, 좌 우 측면에 각각 13개씩 총 40개의 승자총통 장착이 가능했다. 승자총통은 심지에 불을 붙여 총알을 발사하게 돼 있는데, 승자총통 1개가 최대 15발의 탄환을 발사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한꺼번에 발사할 수 있는 최대치는 전방에 210발, 좌우 방향으로 195발 등 총 600발이나 된다. 비밀 병기였고, 신무기였던 이유다.
변이중 화차에 대한 근·현대의 평가는 대단하다. 최남선은 변이중 화차를 ‘탱크의 시조’로, 이윤재는 ‘기관총과 탱크의 원조’로, 그리고 ‘한국과학사상사’의 저자인 박성래는 문종 화차를 획기적으로 개량한 신제품‘이라고 극찬했다.
- 죽어서도 ‘왜’를 응징하다
망암 변이중의 마지막 관직은 1603년(선조 36) 제수받은 함안군수였다. 1605년(선조 38) 병으로 사임한 후 고향으로 내려와 요양 중 1611년(광해군 3) 타계한다. 향년 66세였다.
시징당(장성읍 장안리)
그는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되고, 1697년(숙종 23) 망암이 태어난 장성읍 장안리에 봉암서원이 건립된다. 그리고 서원 앞에는 화차 전시관인 시징당도 있다. 그런데 전시관 이름 ‘시징당’(是懲堂)은 ‘응징하다’, ‘혼내주다’의 뜻을 지닌 ‘징’(懲)자가 재미있다. 변이중의 화차는 망암 사후에도 왜를 응징하고 있다.
봉암서원 전경(장성읍 장안리)
봉암서원 사당 숭양사
시징당 안에는 ‘망암집’을 참고해 만든 화차 3종, 총통 14종, 화살 11종, 신기전 6종, 포통 8종 등이 제작, 전시돼 있다.
망암 변이중, 그는 유학자였지만 국난을 당하자 신무기를 개발해 조선을 구한 과학자였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그가 쓴 ‘총통화전도설’과 ‘화차도설’를 참고해 제작한 화차는 조선 과학사의 큰 족적이 된다. 임진왜란 당시 해전에서의 승리가 거북선 때문이었다면, 육전에서의 승리는 망암이 발명한 ‘화차’ 때문이었다.
2016년 상무대 육군 포병학교는 망암 변이중 선생의 애국심과 화차 발명으로 왜적을 물리친 공적을 높이 평가해 포병 부대 이름을 변이중대대로, 2017년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육군 60사단은 예하 포병연대의 부대명을 ‘변이중 포병연대’로 명명했다.
임진왜란 당시 해전에 거북선이 있었다면, 육전에는 변이중이 만든 화차가 있었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권율의 행주대첩은 바로 변이중의 화차가 결정적 승리 요인이었다.
화차를 만든 변이중(邊以中, 1546-1611)은 장성군 장성읍 장안리에서 참봉을 지낸 변택과 함풍이씨 사이에서 태어난다. 자는 언시(彦時), 호는 망암(望庵), 본관은 황주(黃州)이다.
그의 호 망암은 ‘효’와 관련해서 지어진다. 1576년(선조 9)에 부친이, 이듬해에는 모친이 연이어 사망한 릴게임모바일 다. 변이중은 너무 슬퍼한 나머지 생명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상중에 지켜야 하는 예절은 ‘주자가례’를 따랐다. 부모 묘소 아래에 작은 초막을 짓고 묘를 바라보면서 목 놓아 슬피 울곤 하였다. ‘망암’은 “초막에서 부모의 묘를 바라본다”라는 뜻을 담아 스스로 지은 것이다.
변이중은 13살 때부터 3년간 장성군 진원면에 거주하던 청계 박원순 릴게임하는법 에게 학문을 배운다. 박원순은 생원이 됐지만, 과거를 포기한 채 학문에만 힘쓴 재야의 선비였다. 이후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글과 학문을 수학한다. 1568년(선조 1)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3년(선조 6) 문과에 급제했는데,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의 첫 관직은 종9품 교서관 부정자였다. 관직에 나아간 지 3년 만에 부친 릴게임바다이야기 을 잃고, 이듬해에는 모친마저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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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사·조도어사·독운사가 되다 변이중은 1592년 9월 예조정랑에 임명된다. 그런데 왜적이 전라도로 침입하지 않고 곧바로 북상하자, 동년 10월 전라도 소모사에 임명된다. 소모사(召募使)란 변란이 발발했을 때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국왕이 임시로 임명한 관리를 말한다.
변이중이 파견된 곳은 임진왜란의 화마가 미치지 않았고, 그의 고향이 있는 전라도였다. 변이중은 한 달 만에 수천의 의병과 우거(牛車) 등 군기를 모은 후 의병을 이끌고 수원으로 진군, 경기도 일대의 왜군과 전투를 벌인다.
그는 독성산성 전투 등 몇몇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죽산(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한다. 죽산 전투는 1593년 2월1일자 ‘선조수정실록’에 다음처럼 나온다.
“변이중이 양호(兩湖, 호남과 호서)에서 군사를 소집한 다음, 망령돼 옛 법을 본받아서 우거를 많이 준비해 학익진을 지어 적의 진지에 다다르니, 적들이 칼을 휘두르며 마주나와서 종횡무진 어지럽게 베자, 아군이 패해 흩어졌다. 적이 또 불을 던져 우거를 태우니 우거 위의 군사들이 모두 죽었으며, 변이중은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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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소모사 변이중과 같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은 헌신과 호남인들의 지원으로 치러진 전쟁이었음을 새삼 확인한다. 전라좌수사 이순신도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고 하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호남은 국가를 지켜낸 울타리다”는 ‘호남국가지보장’(湖南國家之保障)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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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기간 피폐해진 ‘민’에 대한 조정의 대책은 없었다. 유성룡은 임금이 글을 내려 위로하고 달래 달라고 청하면서, 인재 등용을 건의하고 있다. 이때 정설과 변이중을 추천한다. 1599년(선조 32), 변이중이 선산부사에 임명된 연유다.
-화차, 행주대첩을 이끌다 망암 변이중 하면 떠오르는 것은 행주대첩의 비밀 병기 화차(火車)다. 변이중의 화차가 행주대첩의 비밀 병기였음은 임진왜란 이후 내내 인구에 회자(膾炙)된다. 임진왜란 발발 400년이 지난 1905년 ‘고종실록’에 “처음으로 화차를 만들어…공(변이중)은 도원수 권율과 함께 군대의 형세를 도왔는데 권율의 행주대첩은 실제로 화차의 위력에 힘입은 것이었다”는 평가도 그 중 하나다.
화차는 ‘화약(무기)을 실은 수레’로, 하나 또는 다수의 화약 무기를 설치해 적에게 발사할 수 있게끔 만든 장비를 말한다. 화차는 당나라 때 처음으로 화약이 개발되면서 등장한다. 우리나라에도 고려말 최무선과 조선 태종대에 만들어진 화차가 있었다. 그러나 가장 유명한 화차는 문종이 직접 설계한 후 동생인 임영대군이 제작한 문종 화차다. 그리고 그 문종 화차의 취약점을 보완한 것이 변이중의 화차였다.
문종 화차는 신기전기나 사전총통으로 화살을 발사하는 곡사화기였지만, 변이중의 화차는 승자총통(勝字銃筒)으로 철환(鐵丸)을 발사하는 직사화기였다. 곡사화기가 직사화기로 바뀌면서 살상력도 증가됐음은 물론이다. 여기에다가 왜군의 조총으로부터 병사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호벽이 있었고, 전면뿐 아닌 좌·우 측면에 승자총통이 장착돼 세 방향의 적을 화차의 이동 없이 공격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변이중 화차의 구조를 더 살펴보자. 전면에 14개, 좌 우 측면에 각각 13개씩 총 40개의 승자총통 장착이 가능했다. 승자총통은 심지에 불을 붙여 총알을 발사하게 돼 있는데, 승자총통 1개가 최대 15발의 탄환을 발사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한꺼번에 발사할 수 있는 최대치는 전방에 210발, 좌우 방향으로 195발 등 총 600발이나 된다. 비밀 병기였고, 신무기였던 이유다.
변이중 화차에 대한 근·현대의 평가는 대단하다. 최남선은 변이중 화차를 ‘탱크의 시조’로, 이윤재는 ‘기관총과 탱크의 원조’로, 그리고 ‘한국과학사상사’의 저자인 박성래는 문종 화차를 획기적으로 개량한 신제품‘이라고 극찬했다.
- 죽어서도 ‘왜’를 응징하다
망암 변이중의 마지막 관직은 1603년(선조 36) 제수받은 함안군수였다. 1605년(선조 38) 병으로 사임한 후 고향으로 내려와 요양 중 1611년(광해군 3) 타계한다. 향년 66세였다.
시징당(장성읍 장안리)
그는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되고, 1697년(숙종 23) 망암이 태어난 장성읍 장안리에 봉암서원이 건립된다. 그리고 서원 앞에는 화차 전시관인 시징당도 있다. 그런데 전시관 이름 ‘시징당’(是懲堂)은 ‘응징하다’, ‘혼내주다’의 뜻을 지닌 ‘징’(懲)자가 재미있다. 변이중의 화차는 망암 사후에도 왜를 응징하고 있다.
봉암서원 전경(장성읍 장안리)
봉암서원 사당 숭양사
시징당 안에는 ‘망암집’을 참고해 만든 화차 3종, 총통 14종, 화살 11종, 신기전 6종, 포통 8종 등이 제작, 전시돼 있다.
망암 변이중, 그는 유학자였지만 국난을 당하자 신무기를 개발해 조선을 구한 과학자였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그가 쓴 ‘총통화전도설’과 ‘화차도설’를 참고해 제작한 화차는 조선 과학사의 큰 족적이 된다. 임진왜란 당시 해전에서의 승리가 거북선 때문이었다면, 육전에서의 승리는 망암이 발명한 ‘화차’ 때문이었다.
2016년 상무대 육군 포병학교는 망암 변이중 선생의 애국심과 화차 발명으로 왜적을 물리친 공적을 높이 평가해 포병 부대 이름을 변이중대대로, 2017년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육군 60사단은 예하 포병연대의 부대명을 ‘변이중 포병연대’로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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