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이야기게임방법 ▦ 33.rnz845.top ㎕ 바다이야기예시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반성규수 작성일25-11-11 16:22 조회0회 댓글0건관련링크
-
http://17.ryg143.top
0회 연결
-
http://42.rpd641.top
0회 연결
본문
【49.rnz845.top】
바다신게임야마토게임예시릴게임모바일바다이야기고래
바다신게임야마토게임예시릴게임모바일바다이야기고래
바다이야기게임방법 ↙ 0.rnz845.top ┢ 바다이야기예시
바다이야기게임방법 ♗ 57.rnz845.top ← 바다이야기예시
바다이야기게임방법 √ 64.rnz845.top ㎣ 바다이야기예시
바다이야기게임방법 ※ 31.rnz845.top ┏ 바다이야기예시
릴게임끝판왕 바로가기 go !!
잊혀진 충북 청주 현대사를 복원하기 위해 청주 기억여행을 떠납니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 4.19 혁명 시기까지 청주에서 있었던 정치, 사회 사건을 살펴보고 지역 현대사를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이 작업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근현대사 역사 텍스트를 만드는 길입니다. 또한 민주주의, 인권, 평화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길이기도 합니다. <기자말>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사위가 칠흙 같이 어두운 시각, 불청객은 목표지점으로 한 발 두 발 다가갔다. 그에게는 두려움도, 주저함도 없었다. 불청객은 대문을 두드렸다.
국회의원 후보자 암살
"의원님 계십니까?"
'누구시냐'라는 물음에 국회의원 선거와 관련해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잠시 후 집주인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신가?"라고 묻는 이의 가슴에 불청객은 정확하게 권총을 조준했다. '탕'하는 소리와 동시에 집주인의 몸이 거꾸러졌다. 1948년 4월 23일 밤이었다.
대동청 년단 충북도단 부단장 서병두가 불청객의 총탄에 쓰러진 지 14일 후 괴산읍 동부리에 살던 김영규가 암살당했다. 비운의 암살을 당한 김영규(1890년생)는 1948년 5월 10일 시행된 제헌의회 선거에 충북 괴산군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한 이였다.
그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8일부터 1946년 3월 10일까지 제3대 충청북도 경찰국장(충청북도 경찰청장의 전신)을 지내고, 1946년 과도입법의원 충청북도 대표를 역임했다.
▲ 서병두 장례식 최시동에게 암살된 서병두 장례식
ⓒ 박만순
김영규는 왜 저격당했을까.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진영과 민족주의세력 일부는 제헌의회 선거를 남한만의 단독선거로 규정하고 선거 보이콧을 했다. 그런데 남로당은 단순히 선거 불참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소위 반민족적인 후보를 암살하고, 투표소를 파괴하는 적극적인 방해 운동을 전개했다.
김영규는 1934년 만주국 안둥성 환런현 경찰서원으로 재직했다. 같은 해 3월 만주국 건국공로장을 받았고, 1939년에는 안둥성 환런현 경좌로 근무했다. 그는 1941년 조선의 경제 전반에 대한 세력 범위를 조사해 국세조사(國勢調査) 기념장도 받았다(<중부광역신문> 2019년 12월 17일 자). 이런 이력 탓에 남로당은 제헌의회 선거 반대 투쟁의 일환으로 김영규를 저격한 것이다.
김영규를 암살한 이는 소백산 빨치산 부대로 복귀하였다. 또 다른 과업에 종사하기 위해 청주를 드나들다가 검거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청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이 언도되었다. 김영규 암살의 범인은 대동청년단 충북도단 부단장 서병두를 죽인 최시동이었다.
최시동은 사형선고를 받고 항소를 해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인민군에 의해 서대문형무소 옥문이 열렸다. 최시동은 청주로 내려왔고 청주내무서 간부를 맡았다. 그러던 중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좌익 척결
1947년 5월 21일에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다. 하지만 1차 때와 마찬가지로 정당 및 사회단체의 가입자격 문제로 회의가 공전되었다.
더군다나 해방 직후와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 때와는 달리 미·소간의 냉전이 격화되고 있었다. 그리스 내전과 중국의 국공(國共)내전의 발발로 공산주의 도미노 현상이 일어날 것을 우려한 미국이 트루먼독트린을 발표했다. 미군정 역시 좌·우합작 운동에 소극적인 자세로 전환했다.
결국 1947년 10월 21일 스티코프가 이끄는 소련 대표단 일행이 평양으로 철수함으로써 5개월간의 회담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나면서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국제연합에 상정했다.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국제연합은 1947년 총회에서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여 UN한국위원단의 감시 하에 한반도에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UN한국임시위원단이 1948년 한반도에 파견되었다. 하지만 소련이 위원단의 38선 이북 입국을 거부하였다. 결국 UN 감시하에 남한만의 국회의원 선거를 하기로 결정되었다.
UN에서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한반도에서는 사실상 미군정의 반공정책이 강화되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익은 좌익에 대한 선전전을 강화했고 경찰은 좌익인사를 체포했다. 이와 관련해 G-2 보고서는 당시 청주지역의 상황을 아래와 같이 본국(미국)에 보고하고 있다.
- 청주 CIC 보고에 따르면 좌익계는 우익계가 살인단체를 결성할 것이라는 뉴스를 들었다는 것이다. 이 단체의 보고는 좌익계 고위공무원 암살과 민주주의민족전선 충청북도 본부건물의 폐쇄라는 것이다(1947.8.14).
- '독립획득의 길'이라는 일련의 강연이 우익인 독립촉성국민회 안의 여성부의 충청북도지부 대표들에 의해 8월 25일 청주에서 시작되었다. 이 강연은 신탁통치 반대, 좌익 분열 획책, 총선 후 UN에 38선의 폐지 요청이 주 내용이었다(1947.9.4).
- 청총 약 40명의 단원이 청주에서 6마일(약 9.6km) 떨어진 마을까지 행진하였다. 그 행진에서 우익은 "모든 공산주의와 좌익을 죽여라", "박헌영을 죽여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때 경찰은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았다(1947.9.16).
- (1947년) 11월 14일부터 17일까지 충청북도 경찰은 서울본부로부터 명령을 받고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충청북도 전 위원장 겸 고문인 노서호와 남조선여성민주동맹의 충청북도 지부 조창숙, 좌익계 관리 안철수를 간첩혐의로 체포했다(1947.11.25).
- 청주경찰의 공산주의자 소탕작전은 좌익 공산지도자들이 청주에서 도망쳤다는 보고가 있은 후에도 한 달 내내 계속되었다(1948.1.30).
실제 실행단계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우익단체는 좌익계 고위공무원 암살을 기획하는 살인단체 결성을 시도했다. 경찰 역시 좌익지도자 검거에 열을 올렸다. 총선을 앞두고 경찰과 우익단체가 좌익 척결에 총매진한 것이다.
도살명부
1948년 5·10선거가 다가오자 충북 영동지역 좌익들은 단선·단정 반대 투쟁을 본격화했다. 특히 남로당 영동군당은 1948년 2·7구국 투쟁 이후 요인 암살, 봉화 시위, 벽보 부착 및 삐라 살포 등의 선전전, 마을 내 집회, 산중 집회, 선거 보이코트 운동 등을 활발히 전개했다.
특히 1948년 4월부터 영동군당은 단정 수립에 적극적인 우익인사들에 대한 도살명부를 작성하는 등 좌익테러 활동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공주대학교 참여문화연구소, '2008년 영동군 피해자현황조사 사업', 2009).
청주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청주에서는 투표소 파괴와 선거관리위원 테러가 빈번했다. 1948년 4월 5일, UN감시단이 체류하고 있는 청주시 대성동 민정식 별장에 수류탄이 던져졌다. 남로당원이 한 일이었다.
4월 9일부터 11일까지는 청주 5곳의 투표소에 테러가 있었다. 그중 2곳의 투표소가 불탔다. 4월 25일에는 미원면의 홍순옥(청원갑구 국회의원 후보자)의 집에 방화가 있었고 4월 29일에는 민영복(청주시 국회의원 후보자)의 자택에 수류탄이 터졌다.
5월 2일에는 미원면 중리 선거위원 김석규의 집에 방화가 있어 방문객 1명이 사망했다. 5월 9일에는 강서면 신성부락 구장(이장) 박승만의 집 근처에 폭발물이 설치되었다. 5·10 선거 후인 5월 24일, 청주에서 민애청(민주애국청년동맹)원이 경찰에 검거되었다. 권총과 탄약, 수류탄을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즉 1948년 4월 초부터 5·10선거 직전까지 남로당은 청주·청원에서 선거방해 투쟁을 전개하였다.
▲ 남로당의 청주청원 지역 선거 방해 투쟁 남로당의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 투쟁 청주 청원지역 사례. 진실화해위원회, 미군정 보고서 등을 토대로 박만순이 작성
ⓒ 박만순
심지어 남로당 청주시당은 도살명부를 작성해 후보자를 포함해 제헌의회 선거에 적극적인 우익인사 암살을 계획했다. 남로당 청주시당이 작성한 도살명부(청주시 반동 대상 제거 대상 을(乙)호 명단)는 아래와 같다.
서병두(대청 부단장), 박계택(대한민청 조사부장, CIC 문관), 홍정흠(백골단 단장), 하건홍(백골단, 청총 회원), 이학구(대한민청 별동대장), 차근호(독촉국민회 청년대), 이장오(청총 회원), 나호기(태극청년단, 북부청년단), 민영복(해방 직후 청주시 초대 부윤, 대동청년단 단장, 청주시 2대 국회의원), 박기운(태극청년단 단장, 대동청년단 부단장, 청주시 제헌 국회의원), 조수석(북부청년단 단장, 제2대(1956년) 충북도의원), 이태희(쇠고리동지회), 민한기(유학생동맹 위원장), 이명하(태극청년단), 조칠수(의혈단, 백골단).
위의 인물 중에 남로당에 의해 희생된 사람은 대동청년단 부단장 서병두가 유일하다. 하지만 위 명부는 남로당의 극단적인 선거투쟁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같은 마을 좌익이 수류탄 던져
대동청년단 충북도단 부위원장이자 한민당 충북도당 청년부장이었던 서병두는 대동청년단 후보로 선출되어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였으나 4월 9일 남로당원에게 암살되어 출마하지 못하였다.
청주 제1 보통학교를 나와 두 차례 일본에 다녀온 서병두는 일제강점기에 청주경방단 간부를 하면서 면도칼이란 별명을 얻었다. 해방 후 서병두는 우익 청년단체의 중심에 섰다. 태극청년단 부단장에 이어 청년조선총동맹 회장을 역임한 데 이어 대동청년단 충북도단부 부단장을 맡았다.
이처럼 서병두는 해방 후 청주 우익단체의 지도자로 자리매김되었고 좌익과 우익의 투쟁 현장을 진두지휘했다. 남로당에 의해 서병두는 제거 대상 영순위에 올랐고 실제 시행되었다.
무심천에 벚꽃이 만발한 날 서병두는 남로당원 최시동의 45구경 권총에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그의 사상과 신념, 활동과는 무관하게 민주주의 사회에서 있어서는 안 될 정치테러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서병두는 충북에서 최초로 대동청년단 단장(團葬)으로 장례를 치렀다.
생애 최초로 투표를 한다는 느낌이 무엇인 줄 감이 오지 않았다. 박귀남을 포함해 야경(夜警)에 나선 이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5·10 선거를 이틀 앞둔 1948년 5월 8일 박귀남과 마을 청년들은 2인 1조로 조를 짜 투표소 경비근무를 섰다.
총 8명이 강외면 제5 투표소로 사용될 마을 공회당을 경계 근무하였다. 야경 후에는 투표소에서 60미터 떨어진 김인영(1904년생.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국회의원 후보 집으로 가서 마작을 하거나 휴식을 취했다.
막 야경을 끝낸 박귀남이 김인영 사랑방에서 목침을 베고 꿈나라에 빠졌을 때였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지축이 울렸다. 박귀남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이옥남, 서용하는 부엌으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중대한 상처를 입었다. 이옥남은 배가 터져 저녁 먹은 것이 삐질삐질 나왔고 서용하도 동맥이 터져 몇 시간 후에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김오남, 박오규, 박종석 3인이 부상당했다. 1948년 5월 8일 새벽 두 시 경이었다.(진실화해위원회, '제헌의원선거 청원군 강외면 제5 투표소 야경원의 좌익세력에 의한 폭살 사건', 2008)
수류탄을 던진 이는 같은 마을 좌익 지도자 김〇영이었다. 남로당 강외면지구당 위원장 김〇영은 동료 2~3명과 함께 김인영 자택에 수류탄을 던져 3명을 즉사시켰다. 그는 사건 직후 지명수배되어 일본으로 밀항했다. 타인 명의로 증명서를 만들고 명치(明治)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강사를 하다가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검거되었다.
즉 남로당은 미군정과 경찰, 우익단체에 의해 합법적인 정치 공간에서 배제되었고, 극단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했다. 민주주의가 실종된 시대였다. 기자 admin@reelnara.info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사위가 칠흙 같이 어두운 시각, 불청객은 목표지점으로 한 발 두 발 다가갔다. 그에게는 두려움도, 주저함도 없었다. 불청객은 대문을 두드렸다.
국회의원 후보자 암살
"의원님 계십니까?"
'누구시냐'라는 물음에 국회의원 선거와 관련해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잠시 후 집주인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신가?"라고 묻는 이의 가슴에 불청객은 정확하게 권총을 조준했다. '탕'하는 소리와 동시에 집주인의 몸이 거꾸러졌다. 1948년 4월 23일 밤이었다.
대동청 년단 충북도단 부단장 서병두가 불청객의 총탄에 쓰러진 지 14일 후 괴산읍 동부리에 살던 김영규가 암살당했다. 비운의 암살을 당한 김영규(1890년생)는 1948년 5월 10일 시행된 제헌의회 선거에 충북 괴산군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한 이였다.
그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8일부터 1946년 3월 10일까지 제3대 충청북도 경찰국장(충청북도 경찰청장의 전신)을 지내고, 1946년 과도입법의원 충청북도 대표를 역임했다.
▲ 서병두 장례식 최시동에게 암살된 서병두 장례식
ⓒ 박만순
김영규는 왜 저격당했을까.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진영과 민족주의세력 일부는 제헌의회 선거를 남한만의 단독선거로 규정하고 선거 보이콧을 했다. 그런데 남로당은 단순히 선거 불참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소위 반민족적인 후보를 암살하고, 투표소를 파괴하는 적극적인 방해 운동을 전개했다.
김영규는 1934년 만주국 안둥성 환런현 경찰서원으로 재직했다. 같은 해 3월 만주국 건국공로장을 받았고, 1939년에는 안둥성 환런현 경좌로 근무했다. 그는 1941년 조선의 경제 전반에 대한 세력 범위를 조사해 국세조사(國勢調査) 기념장도 받았다(<중부광역신문> 2019년 12월 17일 자). 이런 이력 탓에 남로당은 제헌의회 선거 반대 투쟁의 일환으로 김영규를 저격한 것이다.
김영규를 암살한 이는 소백산 빨치산 부대로 복귀하였다. 또 다른 과업에 종사하기 위해 청주를 드나들다가 검거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청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이 언도되었다. 김영규 암살의 범인은 대동청년단 충북도단 부단장 서병두를 죽인 최시동이었다.
최시동은 사형선고를 받고 항소를 해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인민군에 의해 서대문형무소 옥문이 열렸다. 최시동은 청주로 내려왔고 청주내무서 간부를 맡았다. 그러던 중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좌익 척결
1947년 5월 21일에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다. 하지만 1차 때와 마찬가지로 정당 및 사회단체의 가입자격 문제로 회의가 공전되었다.
더군다나 해방 직후와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 때와는 달리 미·소간의 냉전이 격화되고 있었다. 그리스 내전과 중국의 국공(國共)내전의 발발로 공산주의 도미노 현상이 일어날 것을 우려한 미국이 트루먼독트린을 발표했다. 미군정 역시 좌·우합작 운동에 소극적인 자세로 전환했다.
결국 1947년 10월 21일 스티코프가 이끄는 소련 대표단 일행이 평양으로 철수함으로써 5개월간의 회담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나면서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국제연합에 상정했다.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국제연합은 1947년 총회에서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여 UN한국위원단의 감시 하에 한반도에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UN한국임시위원단이 1948년 한반도에 파견되었다. 하지만 소련이 위원단의 38선 이북 입국을 거부하였다. 결국 UN 감시하에 남한만의 국회의원 선거를 하기로 결정되었다.
UN에서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한반도에서는 사실상 미군정의 반공정책이 강화되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익은 좌익에 대한 선전전을 강화했고 경찰은 좌익인사를 체포했다. 이와 관련해 G-2 보고서는 당시 청주지역의 상황을 아래와 같이 본국(미국)에 보고하고 있다.
- 청주 CIC 보고에 따르면 좌익계는 우익계가 살인단체를 결성할 것이라는 뉴스를 들었다는 것이다. 이 단체의 보고는 좌익계 고위공무원 암살과 민주주의민족전선 충청북도 본부건물의 폐쇄라는 것이다(1947.8.14).
- '독립획득의 길'이라는 일련의 강연이 우익인 독립촉성국민회 안의 여성부의 충청북도지부 대표들에 의해 8월 25일 청주에서 시작되었다. 이 강연은 신탁통치 반대, 좌익 분열 획책, 총선 후 UN에 38선의 폐지 요청이 주 내용이었다(1947.9.4).
- 청총 약 40명의 단원이 청주에서 6마일(약 9.6km) 떨어진 마을까지 행진하였다. 그 행진에서 우익은 "모든 공산주의와 좌익을 죽여라", "박헌영을 죽여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때 경찰은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았다(1947.9.16).
- (1947년) 11월 14일부터 17일까지 충청북도 경찰은 서울본부로부터 명령을 받고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충청북도 전 위원장 겸 고문인 노서호와 남조선여성민주동맹의 충청북도 지부 조창숙, 좌익계 관리 안철수를 간첩혐의로 체포했다(1947.11.25).
- 청주경찰의 공산주의자 소탕작전은 좌익 공산지도자들이 청주에서 도망쳤다는 보고가 있은 후에도 한 달 내내 계속되었다(1948.1.30).
실제 실행단계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우익단체는 좌익계 고위공무원 암살을 기획하는 살인단체 결성을 시도했다. 경찰 역시 좌익지도자 검거에 열을 올렸다. 총선을 앞두고 경찰과 우익단체가 좌익 척결에 총매진한 것이다.
도살명부
1948년 5·10선거가 다가오자 충북 영동지역 좌익들은 단선·단정 반대 투쟁을 본격화했다. 특히 남로당 영동군당은 1948년 2·7구국 투쟁 이후 요인 암살, 봉화 시위, 벽보 부착 및 삐라 살포 등의 선전전, 마을 내 집회, 산중 집회, 선거 보이코트 운동 등을 활발히 전개했다.
특히 1948년 4월부터 영동군당은 단정 수립에 적극적인 우익인사들에 대한 도살명부를 작성하는 등 좌익테러 활동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공주대학교 참여문화연구소, '2008년 영동군 피해자현황조사 사업', 2009).
청주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청주에서는 투표소 파괴와 선거관리위원 테러가 빈번했다. 1948년 4월 5일, UN감시단이 체류하고 있는 청주시 대성동 민정식 별장에 수류탄이 던져졌다. 남로당원이 한 일이었다.
4월 9일부터 11일까지는 청주 5곳의 투표소에 테러가 있었다. 그중 2곳의 투표소가 불탔다. 4월 25일에는 미원면의 홍순옥(청원갑구 국회의원 후보자)의 집에 방화가 있었고 4월 29일에는 민영복(청주시 국회의원 후보자)의 자택에 수류탄이 터졌다.
5월 2일에는 미원면 중리 선거위원 김석규의 집에 방화가 있어 방문객 1명이 사망했다. 5월 9일에는 강서면 신성부락 구장(이장) 박승만의 집 근처에 폭발물이 설치되었다. 5·10 선거 후인 5월 24일, 청주에서 민애청(민주애국청년동맹)원이 경찰에 검거되었다. 권총과 탄약, 수류탄을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즉 1948년 4월 초부터 5·10선거 직전까지 남로당은 청주·청원에서 선거방해 투쟁을 전개하였다.
▲ 남로당의 청주청원 지역 선거 방해 투쟁 남로당의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 투쟁 청주 청원지역 사례. 진실화해위원회, 미군정 보고서 등을 토대로 박만순이 작성
ⓒ 박만순
심지어 남로당 청주시당은 도살명부를 작성해 후보자를 포함해 제헌의회 선거에 적극적인 우익인사 암살을 계획했다. 남로당 청주시당이 작성한 도살명부(청주시 반동 대상 제거 대상 을(乙)호 명단)는 아래와 같다.
서병두(대청 부단장), 박계택(대한민청 조사부장, CIC 문관), 홍정흠(백골단 단장), 하건홍(백골단, 청총 회원), 이학구(대한민청 별동대장), 차근호(독촉국민회 청년대), 이장오(청총 회원), 나호기(태극청년단, 북부청년단), 민영복(해방 직후 청주시 초대 부윤, 대동청년단 단장, 청주시 2대 국회의원), 박기운(태극청년단 단장, 대동청년단 부단장, 청주시 제헌 국회의원), 조수석(북부청년단 단장, 제2대(1956년) 충북도의원), 이태희(쇠고리동지회), 민한기(유학생동맹 위원장), 이명하(태극청년단), 조칠수(의혈단, 백골단).
위의 인물 중에 남로당에 의해 희생된 사람은 대동청년단 부단장 서병두가 유일하다. 하지만 위 명부는 남로당의 극단적인 선거투쟁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같은 마을 좌익이 수류탄 던져
대동청년단 충북도단 부위원장이자 한민당 충북도당 청년부장이었던 서병두는 대동청년단 후보로 선출되어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였으나 4월 9일 남로당원에게 암살되어 출마하지 못하였다.
청주 제1 보통학교를 나와 두 차례 일본에 다녀온 서병두는 일제강점기에 청주경방단 간부를 하면서 면도칼이란 별명을 얻었다. 해방 후 서병두는 우익 청년단체의 중심에 섰다. 태극청년단 부단장에 이어 청년조선총동맹 회장을 역임한 데 이어 대동청년단 충북도단부 부단장을 맡았다.
이처럼 서병두는 해방 후 청주 우익단체의 지도자로 자리매김되었고 좌익과 우익의 투쟁 현장을 진두지휘했다. 남로당에 의해 서병두는 제거 대상 영순위에 올랐고 실제 시행되었다.
무심천에 벚꽃이 만발한 날 서병두는 남로당원 최시동의 45구경 권총에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그의 사상과 신념, 활동과는 무관하게 민주주의 사회에서 있어서는 안 될 정치테러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서병두는 충북에서 최초로 대동청년단 단장(團葬)으로 장례를 치렀다.
생애 최초로 투표를 한다는 느낌이 무엇인 줄 감이 오지 않았다. 박귀남을 포함해 야경(夜警)에 나선 이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5·10 선거를 이틀 앞둔 1948년 5월 8일 박귀남과 마을 청년들은 2인 1조로 조를 짜 투표소 경비근무를 섰다.
총 8명이 강외면 제5 투표소로 사용될 마을 공회당을 경계 근무하였다. 야경 후에는 투표소에서 60미터 떨어진 김인영(1904년생.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국회의원 후보 집으로 가서 마작을 하거나 휴식을 취했다.
막 야경을 끝낸 박귀남이 김인영 사랑방에서 목침을 베고 꿈나라에 빠졌을 때였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지축이 울렸다. 박귀남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이옥남, 서용하는 부엌으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중대한 상처를 입었다. 이옥남은 배가 터져 저녁 먹은 것이 삐질삐질 나왔고 서용하도 동맥이 터져 몇 시간 후에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김오남, 박오규, 박종석 3인이 부상당했다. 1948년 5월 8일 새벽 두 시 경이었다.(진실화해위원회, '제헌의원선거 청원군 강외면 제5 투표소 야경원의 좌익세력에 의한 폭살 사건', 2008)
수류탄을 던진 이는 같은 마을 좌익 지도자 김〇영이었다. 남로당 강외면지구당 위원장 김〇영은 동료 2~3명과 함께 김인영 자택에 수류탄을 던져 3명을 즉사시켰다. 그는 사건 직후 지명수배되어 일본으로 밀항했다. 타인 명의로 증명서를 만들고 명치(明治)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강사를 하다가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검거되었다.
즉 남로당은 미군정과 경찰, 우익단체에 의해 합법적인 정치 공간에서 배제되었고, 극단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했다. 민주주의가 실종된 시대였다. 기자 admin@reelnara.info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