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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는 바쁜 모습에 저 때 한지난 2012년 방한한 나카다이 다쓰야가 서울 마포구 스탠포드호텔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DB
일본 영화계를 대표하는 원로 배우 나카다이 다쓰야(仲代達矢·본명 나카다이 모토히사)가 별세했다. 92세.
11일 아사히신문은 고인이 지난 8일 폐렴으로 별세했다고 보도했다. 교도통신은 나카다이에 대해 “분쟁이 이어지는 세계를 걱정하면서 평화의 소중함을 몸으로 표현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한 배우”라고 기억했다.
1932년 도쿄에서 태어난 나카다이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배우양성소에 들어가 연기 를 시작했다. 첫 데뷔는 영화가 아닌 연극 무대였는데,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희곡 ‘유령’에 출연해 단숨에 대형 신인으로 떠올랐다.
나카다이는 영화계 거장들의 작품에 연이어 출연하며 1950~80년대 일본 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대표작인 고바야시 마사키(小林正樹) 감독의 ‘인간의 조건(1959~1961)’에서 주인공을 맡아 이름을 알렸다. 총 상영 시간이 10시간에 달하는 이 작품에서 나카다이는 전쟁에 휘말린 한 인간의 일생을 연기했다.
고바야시 사후인 2016년 나카다이는 당시의 고충을 털어놨다. 그는 “움직이고 있는 전차 밑에 뛰어들어야 해서 일주일 동안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긴장했었다. 마지막 장면을 촬영할 땐 의식이 몽롱한 상태였다”며 “신인 때 그렇게 엄격하게 배웠기 때문에 지금까지 60여년의 배우 인생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2010년 ‘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 참석차 한국을 찾은 나카다이 다쓰야(오른쪽)와 구로사와 감독의 스크립터였던 노가미 데루요. 사 진 중앙DB
그의 연기 인생에서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을 빼놓을 수 없다. 나카다이는 19세 때 구로사와의 ‘7인의 사무라이(1954)’에 출연하며 처음 연을 맺었다. 지나가는 조연으로 단 몇 초만 출연했을 뿐이지만, 이후 구로사와의 작품에 꾸준히 얼굴을 비치며 ‘구로사와의 페르소나’ 로 거듭났다.
구로사와의 걸작으로 꼽히는 ‘가게무샤(1980)’에서도 주연을 맡았다. 일본 센코쿠(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이 영화는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나카다이는 NHK TV 대하드라마에도 출연하는 등 스크린과 브라운관, 연극 무대를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1975년 같은 배우 출신인 아내 미야자키 쿄코(宮崎恭子)와 ‘무명학원’을 설립해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일본 국민배우 야쿠쇼 코지(役所広司)가 그의 제자다. 나카다이 자신도 최근까지 무명학원에서 연극 무대에 섰다.
한국과도 인연이 각별하다. 나카다이는 2010~2012년 3년 연속으로 한국을 찾았다. 2010년 방한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나카다이는 “연기란 삶”이라며 “인간의 고민, 마음의 상태, 방황 등을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윤서 기자 chang.yoonseo1@joongang.co.kr 기자 admin@no1reelsite.com
일본 영화계를 대표하는 원로 배우 나카다이 다쓰야(仲代達矢·본명 나카다이 모토히사)가 별세했다. 92세.
11일 아사히신문은 고인이 지난 8일 폐렴으로 별세했다고 보도했다. 교도통신은 나카다이에 대해 “분쟁이 이어지는 세계를 걱정하면서 평화의 소중함을 몸으로 표현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한 배우”라고 기억했다.
1932년 도쿄에서 태어난 나카다이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배우양성소에 들어가 연기 를 시작했다. 첫 데뷔는 영화가 아닌 연극 무대였는데,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희곡 ‘유령’에 출연해 단숨에 대형 신인으로 떠올랐다.
나카다이는 영화계 거장들의 작품에 연이어 출연하며 1950~80년대 일본 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대표작인 고바야시 마사키(小林正樹) 감독의 ‘인간의 조건(1959~1961)’에서 주인공을 맡아 이름을 알렸다. 총 상영 시간이 10시간에 달하는 이 작품에서 나카다이는 전쟁에 휘말린 한 인간의 일생을 연기했다.
고바야시 사후인 2016년 나카다이는 당시의 고충을 털어놨다. 그는 “움직이고 있는 전차 밑에 뛰어들어야 해서 일주일 동안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긴장했었다. 마지막 장면을 촬영할 땐 의식이 몽롱한 상태였다”며 “신인 때 그렇게 엄격하게 배웠기 때문에 지금까지 60여년의 배우 인생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2010년 ‘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 참석차 한국을 찾은 나카다이 다쓰야(오른쪽)와 구로사와 감독의 스크립터였던 노가미 데루요. 사 진 중앙DB
그의 연기 인생에서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을 빼놓을 수 없다. 나카다이는 19세 때 구로사와의 ‘7인의 사무라이(1954)’에 출연하며 처음 연을 맺었다. 지나가는 조연으로 단 몇 초만 출연했을 뿐이지만, 이후 구로사와의 작품에 꾸준히 얼굴을 비치며 ‘구로사와의 페르소나’ 로 거듭났다.
구로사와의 걸작으로 꼽히는 ‘가게무샤(1980)’에서도 주연을 맡았다. 일본 센코쿠(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이 영화는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나카다이는 NHK TV 대하드라마에도 출연하는 등 스크린과 브라운관, 연극 무대를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1975년 같은 배우 출신인 아내 미야자키 쿄코(宮崎恭子)와 ‘무명학원’을 설립해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일본 국민배우 야쿠쇼 코지(役所広司)가 그의 제자다. 나카다이 자신도 최근까지 무명학원에서 연극 무대에 섰다.
한국과도 인연이 각별하다. 나카다이는 2010~2012년 3년 연속으로 한국을 찾았다. 2010년 방한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나카다이는 “연기란 삶”이라며 “인간의 고민, 마음의 상태, 방황 등을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윤서 기자 chang.yoonseo1@joongang.co.kr 기자 admin@no1reelsi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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