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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났다편집자주
6.25 전쟁 75주년 기획 ‘명장’은 대한민국을 구한 장군들의 ‘가장 빛나던 순간’을 조명합니다. 총체적 난국을 타개하고 전황을 뒤집은 리더십의 성공 비결을 알아봅니다.
외인부대 재직 시절의 랄프 몽클라르 장군. 아들 롤랑 몽클라르 소장
“한국엔 저를 보내 주십시오.”
1950년 8월 프랑스 파리 국방부 청사. 별 넷 장군(프랑스군은 중장이 4성)이 막스 오리지널골드몽 르죈 국방차관과 클레망 블랑 육군참모총장을 열심히 설득하고 있었다. 두 달 전 전화에 휩싸인 한국에 유엔 이름으로 군대를 보내야 하는데, 명색이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프랑스가 약한 부대를 내세우긴 면구스러웠다. 게다가 1940년 나치 독일에 항복한 뒤 프랑스가 처음 보내는 해외 파병이다. 세상은 독일 기갑부대의 낫질 작전(아르덴 숲 돌파)에 허무하게 당하며 모바일바다이야기하는법 6주 만에 두 손 든 ‘유약한 프랑스군’만 기억했다. 군사강국 이미지를 다시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확실한 군사적 성과를 거둘 유능한 지휘관을 골라야 했다.
“저는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았습니다. 아이에게 아버지가 첫 유엔군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
장군은 설 바다신2게임 득을 이어갔다. ‘이 사람 혹시 전쟁광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도록 싸우고 싶어 안달난 장군. 그는 정년을 눈앞에 둔 58세 육군 중장 라울 마그랭 베르느레다. 2차대전 레지스탕스 활동을 할 때 신분을 숨기려고 만든 가명, ‘랄프 몽클라르’로 더 잘 알려진 프랑스 외인부대 장성이다.
프랑스 정부는 한국에 대대급 부대를 보내기로 한 터였다. 바다이야기 1,000명 정도 파병부대엔 장군이 맡을 보직이 없었다. 계급으로 보면 몽클라르는 대대가 아니라 군단(corps)을 지휘하는 중장(général de corps d'armée)이었다. 당연히 국방차관은 “중령이 갈 자리”라며 몽클라르의 주장을 일축했다. 그랬더니 몽클라르는 이렇게 제안했다.
“그렇다면 중령이라도 좋습 백경게임랜드 니다. 계급을 깎겠습니다.”
몽클라르는 군생활 마지막을 전장에서 정리하고 싶었고, 프랑스 정부는 한국에 작지만 구성이 알찬 지상군을 보내고 싶었다. 자발적 강등은 둘 다 만족할 수 있는 묘안이었다. 국방부나 육군참모부 입장에선, 몽클라르가 그래 주기만 한다면야 나쁠 게 없었다. 몽클라르는 샤를 드골 못지않은 전쟁 영웅이었으니까. 1차대전 때 일곱 차례 부상을 입고 열 번이나 훈장과 표창을 받으며 맹활약했다. 전간기 북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서 많은 전투 경험을 쌓았고, 1940년엔 노르웨이 나르비크에서 지상군을 이끌며 2차대전 초반(1939·1940년) 프랑스군의 유일한 승리를 고국에 바쳤다. 북아프리카에선 에리트리아 주둔 이탈리아군을 공략해 해군 제독 등 다수 장성을 포함한 1만4,000명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랄프 몽클라르 이력. 박종범 기자
“몽클라르의 군복에는 프랑스 정부가 줄 수 있는 모든 훈장이 다 달려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프랑스 참전 부대를 이끄는 영광을 선택했다.”
(미국 언론인 겸 작가 조지프 굴든)
왜 중장은 스스로 중령이 됐나
국가적 영웅이었던 중장이 갑자기 네 계급을 낮춰 중령이 된 경위를 파악하려면, 프랑스가 왜 한국에 대대급 병력을 보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당시 프랑스 처지는 복잡했다. 아직 2차대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공산당과 사회주의 세력이 강해 반공국가 남한을 돕는 파병에 부정적 시선이 존재했다.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가 1950년 6월 26일 “미국 꼭두각시 이승만 정부가 국경선에서 공격을 감행했다”며 북침을 주장할 정도였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미소 냉전은 이미 사상계에까지 영향을 미쳐,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프랑스의 지성계도 북한 편(북침 주장)과 남한 편(남침 주장)으로 양분됐다. 실존주의의 대가이자 프랑스 현대철학의 태두 장 폴 사르트르는 소련에 경도돼 북한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현상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절친한 친구 사르트르와 한국전쟁을 계기로 사이가 틀어지는데, 메를로퐁티는 한국의 전쟁 소식을 듣고 소련과 스탈린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사르트르는 메를로퐁티와 사이가 멀어진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여름이 왔고, 한국에서 전쟁이 시작됐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 의견은 일치되지 못했다. 8월에 다시 만났지만 균열만이 있었다. 이미 굳어진 우리 생각은 서로 소통될 수 없었다.”
프랑스 현대철학의 거두 장 폴 사르트르. 한국일보 자료사진
당시 프랑스가 극복하기 어려웠던 가장 현실적인 장애물은 이미 식민지 인도차이나에서 호찌민의 베트민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년)이다. 베트남에 보낸 병력이 8만 명을 넘어섰고, 국방예산 4분의 1을 인도차이나에 쏟아붓고 있었다. 그래서 애초 프랑스 정부는 한국에 전투병 대신 옵서버(장교단)만 보내는 정도로 면피를 하려 했는데, 유엔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전투 구경만 하는 장교단 파견을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결국 당시 군사적 여력, 2차대전 때 미국·영국에 진 빚, 상임이사국의 책임감, 국내 반대 여론 등 여러 상충된 요소를 감안한 결과가 ‘1개 대대 파병’이었다. 야전군 이상 대규모 인원을 상시 주둔시킨 미국, 여단급 부대 이상을 보낸 영국 캐나다 튀르키예에 비해 규모가 확실히 작았고, 태국 필리핀 벨기에 그리스 네덜란드 콜롬비아 에티오피아(이상 1개 대대)와 비슷했다.
그러나 크지 않았던 프랑스군의 존재감을 높여준 것은 단연 사령관 몽클라르였다. 지상군 총사령관 매슈 리지웨이와 계급이 같았고 나이는 세 살이 더 많았던 몽클라르는 중령 계급장을 달고 미군 대령(연대장)에게 복종했지만, 작전 이외 문제에선 어딜 가나 장군 예우를 받았다.
막스 르죈(왼쪽에서 네 번째 양복 입은 인물) 프랑스 국방차관과 랄프 몽클라르 장군이 1950년 9월 르망 인근 오부르 기지에서 파병 장병들의 장비를 점검하고 있다. 주한프랑스대사관 '프랑스대대 사진집'
“프랑스에서 우세하던 이데올로기는 파병에 반대했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전쟁이었기 때문이었죠. 당시 프랑스 공산당은 사회에서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했어요.”
(한국전쟁 참전용사 클로드 마시카르의 '르 피가로' 인터뷰)
프랑스 대대가 전원 지원자로 구성된 정예였다는 점도 특이하다. 기록으로 보면 지원자 대부분 공산주의에 반감을 가졌던 것으로 나오지만, 저마다의 지원 이유는 무척 다양했다. 영어를 배울 수 있겠다며, 해외 생활을 해 보고 싶어서, 개인적 모험을 위해,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보려고, 돈을 벌 목적으로, 그들은 한국에 왔다. 인도차이나보다 더 날씨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온 지원자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순히 세계 지도를 보면 서울이 니스나 마르세유보다 위도가 훨씬 낮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도만 보고 대륙 동안의 혹독한 기후를 간과했던 지원자들은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한반도의 북극 추위를 맛봐야 했다.
그렇게 다양한 사연을 품은 1,017명 장병이 1950년 10월 25일 마르세유에서 한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한국 파병에 대한 좌파 진영의 반감은 여전해, 당시 마르세유 항구 노동자들은 파병군이 타고 갈 수송선을 파손하려고 했다. 군인들은 이에 반발해 파병 반대 기사를 게재한 마르세유 지역 좌파 일간지 ‘라 마르세예즈’ 건물을 급습하기도 했다. 좌우 대결의 불안한 긴장감 속에서, 프랑스 대대는 대낮에 국민들 환송을 받지 못하고 야밤에 항구를 떠나야 했다.
한 달이 넘게 걸린 긴 항해 끝에, 프랑스 대대는 1950년 11월 29일 부산에 도착했다. 당시는 남북통일의 꿈이 중공군 개입으로 무산된 직후였다. 중공군은 두 차례 공세를 통해 유엔군을 청천강 남쪽으로 몰아내고 평양 수복을 시도하고 있었다. 프랑스 대대 일부 병사들은 ‘이렇게 중공군에 계속 밀리면 우리가 전투에 참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프랑스 대대는 일단 미 8군사령부가 위치한 대구로 이동해 무기·장비를 보급받은 뒤, 미군 무기와 작전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계속했다. 그리고 12월 11일 미 2사단 23보병연대에 배속됐다. 수원 충주 단양 횡성을 거쳐, 1951년 1월 원주로 이동해 첫 전투를 치른다. 원주-양평 사이 철도 터널이 두 개 연속으로 뚫린 지역에서 ‘쌍터널 전투’를 승리로 장식한 뒤, 드디어 한국전쟁 흐름을 완전히 뒤바꾼 운명의 싸움이 펼쳐질 경기 양평군 지평리 마을에 도착했다. 1951년 2월 3일이다.
“매슈 리지웨이가 꿈꾸던 전투가 마침내 지평리에서 벌어졌다.”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윈터'
6.25 전쟁에 개입한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 대병력이 압록강을 넘고 있다. 이 사진은 1958년 북한에서 발간된 기념 책자에 실린 사진을 스캔한 것이다. 위키미디어 커먼즈
지평리로 모이는 검은 기운
지평리 전투(1951년 2월 13~16일)는 중공군 4차 공세(2월 11~18일) 기간 중 치러진 가장 중요한 싸움이다. 미군과 프랑스군이 연합한 유엔군 1개 연대전투단(정규 보병연대+포병·방공포·공병 등 소규모 부대)이 중공군 4개 사단에 맞서 최대 1대 10의 병력 열세를 딛고 거둔 승리다
당시 미 23연대전투단이 양평에서 중공군 대병력과 맞서기까지 상황을 살펴본다. 1951년 1월 초는 6·25 전쟁 중 한국이 가장 위기에 몰렸던 시기다. 이때 유엔군은 1·4 후퇴(서울 재함락) 이후 한반도 전면 철수까지 검토하다가, 1월 중순부터 신임 미8군사령관 리지웨이의 공세적 접근(울프하운드·선더볼트 작전) 덕분에 서서히 자신감을 회복했다. 서울을 포기하고 37도선(평택-삼척)까지 밀렸던 유엔군은 2월 들어 한강 유역으로 접근하며 서울 재탈환 준비를 착실하게 하고 있었다.
리지웨이가 3개월 동안 펼친 작전
양평군 남동쪽에 자리한 지평리는 중앙선 철도가 동서로 통과하고, 서울행 도로와 춘천·충주행 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유엔군 입장에선 공산군의 좌우 이동을 차단하면서 광주 쪽에 주둔한 중공군 병력을 견제할 수 있는 양수겸장 요지였다.
리지웨이는 이 지평리 사수 임무를 미 2사단 23연대전투단에 맡겼다. 23연대전투단은 23보병연대에 야포대대, 특공중대, 고사포포대, 전투공병중대 등을 결합해 일반 보병연대보다 월등한 화력을 자랑했다. 당시 미 육군 보병연대는 통상 3개 보병대대, 1개 본부중대, 1개 지원중대, 1개 기갑중대, 1개 박격포중대, 1개 의무중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23연대전투단은 여기에 더해 155㎜ 곡사포 6문, 105㎜ 포 18문, 1개 중대급 대공화기, 전차 20대, 박격포 50문을 추가 보유했다.
그리고 백전노장 몽클라르가 이끄는 프랑스 대대가 연대전투단 전력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프리먼의 지휘 철학은 ‘부하들이 찾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신념은 지휘관으로서 부하에게 최대한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부하에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고 용기를 북돋는 한마디도 곁들였다. 병사 위에 군림하지 않았고 잘난 체하지 않았다.”
(미 군사사학자 케네스 햄버거)
6.25 전쟁 당시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폴 프리먼 당시 미23연대장. 미 육군
지장 프리먼-용장 몽클라르
지평리에 진을 친 23연대전투단의 지휘관은 폴 프리먼 미 육군 대령(23연대장·나중에 대장 진급)이었다. 이 시점에서 프리먼의 최대 장점은 한국에 파병된 그 어떤 미군 장교보다 중국을 잘 알았다는 것. 필리핀에서 군의관 아들로 태어난 프리먼은 어린 시절 대부분을 동아시아에서 살았고, 장교 임관 후에도 중국에서 여러 차례 근무해 중국어에 능통했다. 당연히 중공군 전술과 특성에 익숙했고, 지평리 근처에서 생포된 중공군 포로를 직접 심문하며 적의 증원 상황을 점검했다.
프리먼의 또 다른 특징은 ‘철저한 준비의 달인’이었다는 점. 2월 3일 지평리에 입성한 그는 공격이 시작되기까지 열흘 동안 지평리 마을을 철벽 요새로 탈바꿈시켰다. 23연대전투단은 낮은 언덕을 잇는 원형 방어진을 치고, 각 방향 참호 앞에 지뢰와 철조망을 촘촘하게 깔아 사주경계를 하며 중공군의 공세에 대비했다. 부대와 부대 사이 빈 공간에는 자동화기를 집중 배치해 화망을 형성했다. 특히 프리먼은 식량과 탄약을 최대한 많이 쌓아 뒀는데, 오히려 비축량이 너무 많아서 프리먼 스스로 ‘이러다 전투가 벌어지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이 생길 수 있겠다’며 걱정할 정도였다. 원형 방어는 퇴로를 스스로 끊고 고립을 자초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유엔군의 우세한 화력과 압도적 공군력(폭격 및 공중보급)을 믿고 23연대전투단은 버티기에 들어갔다.
해야 할 일을 차분하고 정확하게 하는 프리먼은 의외로 ‘용장’ 몽클라르와 궁합이 잘 맞았다. 몽클라르보다 열 다섯 살 어렸던 그는 우방국의 군단장급 노장군을 부하로 들이는 것이 처음엔 껄끄러웠지만, 계급 높은 티를 내지 않았던 몽클라르와 이내 훌륭한 협조 관계를 형성했고 전쟁이 끝나고서도 서로 친구로 남았다.
몽클라르의 최대 장점은 용기와 솔선수범이다. 몽클라르는 ‘지휘관이 항상 전투 현장에 있으면서 부하에게 자신감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름지기 리더라면 조직원과 함께 희생하고 위험, 고난, 피로를 똑같이 나눠야 한다고 여겼다. 몽클라르는 태생적으로 겁이 없어 총탄·포탄 소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참호에서는 고개를 숙이지 않고 언제나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며 이동했다.
그는 아들뻘보다도 더 어린 병사들의 사기를 세심하게 챙겼고, 병사들 사기를 높일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제서야 장군의 권위를 이용해 본국에 강하게 요청했다. 한국에서 몽클라르가 즐겨 했던 말은 “사기를 높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meal(식사)이고 다른 하나는 mail(편지)”이라는 얘기다. 프랑스 대대 조리병은 “장군님이 항상 뒤에 서서 음식 만드는 걸 감시하신다”고 푸념했고, 우편 담당 장교(소위)는 돈을 아끼겠다고 빠른 우편 대신 일반 우편으로 본국에 편지를 보내다가 몽클라르에게 호된 질책을 당하기도 했다.
“프랑스군은 군인에게 적용할 수 있는 어떤 기준으로 봐도 이 전쟁에서 최상의 군대였다. 미군은 땅 파기를 싫어해 참호를 얕게 팠지만, 프랑스 병사들은 누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깊게 팠다.
(미국 잡지 '새터데이 이브닐 포스지'의 해럴드 마틴 기자)
지평리 전투 개요도. 박종범 기자
프랑스 대대의 맹활약
때마침 운명의 전장 지평리에서 미군 지장과 프랑스 용장이 합심하여 버티고 있었던 것은 유엔군에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원형 교두보 안에서 방어하던 유엔군은 약 5,400명, 주변을 포위한 중공군 병력은 수만 명에 이르렀다. 기록에 따라 중공군 병력 규모에는 차이가 있는데, 지평리 전투 기록을 가장 상세하게 남긴 전사가 케네스 햄버거의 집계에 따르면 △미 공식 전사에선 6개 연대 △한국전쟁 참전 전사가 로이 애플먼의 기록으론 4개 사단+1개 연대 △현장에 있던 프리먼의 추정으론 5개 사단에 이르렀다. 대략 3, 4개 사단 정도가 공격에 나섰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중공군 총병력은 최소 1만8,000명에서 최대 7만 명 수준이었다. 중공군이 유엔군에 비해 병력 면에서 네 배에서 열 배 정도 우세했던 셈이다.
유엔군의 원형 방어망은 4개 보병대대(미국 3+프랑스 1)가 사방을 한쪽씩 맡아 고정진지를 구축하고, 포병과 예비대가 내부에서 보병을 지원하는 구조였다. 북쪽은 23연대 1대대, 동쪽은 3대대, 남쪽을 2대대가 방어했고, 가장 방어선이 길고 유일한 개활지(논)였던 서쪽(7시~11시 방향)을 프랑스 대대가 담당했다. 프랑스 대대 소속 4개 보병중대 중 1개는 한국인 중대였다.
지평리 전투는 첫 공격 시작 시점인 2월 13일 오후 5시 30분부터, 유엔군 증원부대(미 5기병연대 크롬베즈 특임대)가 중공군 포위를 뚫어낸 15일 오후 5시 15분까지 48시간 내내 거의 쉴 틈 없이 이어졌다. 용장 밑에 약졸 없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프랑스군은 첫날부터 대병력의 기세에 밀리지 않으며 감투정신을 십분 발휘했다. 중공군 1개 소대가 참호로 접근하자, 프랑스 1개 분대가 철모를 벗은 뒤 빨간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착검 돌격(백병전)을 감행했는데, 이 기세에 눌린 중공군이 혼비백산하고 후퇴했고 프랑스군은 이를 추격해 15명의 포로를 생포했다.
14일 밤부터 15일 아침 사이 유엔군의 최대 위기가 찾아왔다. 미군 2대대가 담당하는 남쪽 방어선에 10분 간격으로 중공군의 제파 공격(특정 지점에 여러 공격 부대를 연속 투입)이 이뤄지면서 결국 방어선 일부가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 2대대의 오른쪽 인접부대인 프랑스 대대는 후퇴하지 않고 양면에서 중공군 공격을 버티며 진지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15일 미군의 첫 구원부대가 남쪽 산을 넘어 방어선 진입에 성공하고 후속 부대가 16일 속속 진입하면서, 만 사흘에 걸친 지평리 전투가 유엔군 승리로 막을 내렸다. 유엔군 전사자 52명, 중공군 전사자 4,946명(중국 측 2,000명 주장)으로 적 사망이 아군의 100배에 달하는 대첩이었다.
지평리 전투 장면을 그린 미군의 포스터. 미 육군
“우리는 출동했고 승리했다. 그러나 지평리가 해결되지 않았다.”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의 회고)
지평리 전투의 의미
어떤 의미에선 한국전쟁을 ‘지평리 이전’과 ‘지평리 이후’로 양분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승전의 파급효과는 컸다. 대패한 중공군은 이 전투 하나 때문에 4차 공세를 전체를 날려 버렸고, 다음 일제공격인 5차 공세(4월 22일 시작)까지 두 달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중공군이 움츠린 동안 국군과 유엔군은 △킬러 작전(한강 남안 도달) △리퍼 작전(서울 재탈환) △커레이저스 작전(38선 도달) △러기드 작전(38선 이북 진격)을 차례로 성공시키며, 전세를 확실하게 뒤집었다.
유엔군 입장에서 지평리 전투는 중국의 한반도 개입(1950년 10월 25일 1차공세) 이후 4개월 만에 ‘신출귀몰 중공군’을 상대로 거둔 첫 번째 승리였다. 가위눌렸던 유엔군은 ‘확신을 가지고 우세한 화력을 계속 집중하면 중공군 파상공세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마침내 패배주의를 극복할 수 있었다.
마오쩌둥과 김일성 입장에선 단순한 병력 손실 이상의 큰 타격이었다. 냉전 후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당시 마오쩌둥 정부는 이 패전을 계기로 미국의 화력을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고 사실상 한반도 전체 점령 계획을 포기했다. 올해 6월 6·25전쟁 75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위해 방한한 선즈화 중국 화둥사범대 교수는 “중국이 한반도 파병 이래 엄중한 타격을 입은 첫 전투이자 전환점”이라며 “중공군이 이기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된 계기”라고 지평리의 의미를 풀이했다. 한반도 철수를 염두에 뒀던 미국이 자신감을 얻고, 반대로 한반도를 모두 점령할 수 있다고 자부했던 중국의 기세가 확 꺾이면서, 6·25전쟁은 지평리를 계기로 ‘정전협상에 의한 해결’ 쪽으로 급격하게 무게 추가 쏠렸다.
몽클라르와 프랑스 대대가 이 전투의 승리의 1등 공신이라고까지는 보기 어렵지만, 프랑스군의 감투정신이 없었다면 지평리 전투 승리가 어려웠을 것이란 점엔 별다른 이견이 없다. 당시 군단장과 사단장의 철수 요청을 거절하고 지평리 절대 사수 방침을 밝혔던 리지웨이는 1952년 미 의회 연설에서 “영하의 날씨에 완벽하게 포위된 23연대와 프랑스 대대는 수적으로 절대 우세한 적의 계속된 공격을 밤낮으로 격퇴했다”며 “두 나라의 가장 최고 군인들이 형제애를 가지고 최고의 업적을 쌓았다”고 평가했다.
“우리는 문명과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한국에 가야 한다.”
(몽클라르가 한국 참전 지원자를 모을 때 했던 연설)
한국전쟁 참전 유엔군 주요국 사상자. 박종범 기자
계급을 깎으면서까지 해외 파병에 합류한 장군, 100% 지원자로 이뤄진 장교와 사병. 프랑스 대대는 규모는 작았지만 16개 유엔 참전국 소속 군대 중에서 가장 투지 넘치게 싸웠던 부대로 손꼽힌다. 프리먼 후임으로 23연대장 자리를 이어받은 존 차일스 대령은 “프랑스군은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며 “그들은 자기 위치를 유지했고, 언제나 목표를 수행했으며,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고 칭찬했다. 프랑스 대대엔 3년 동안 연인원 3,421명이 거쳐갔고, 이 중 1,289명이 죽거나 다쳤다. 사상자 비율이 37.7%에 달하는데, 이는 전체 참전군 사상자 비율(7.7%)의 다섯 배에 가까운 수준이다.
다른 나라 부대에 비해 파병 기간이 길었다는 점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겠지만, 프랑스 대대가 목숨을 아끼지 않은 것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을 한국으로 이끈 동기가 매우 고결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일부 장교와 병사들은 “우린 한국이란 나라를 모르지만, 그 나라의 자유를 지키러 간다”고 말했다. 2차대전 당시 독일에 짓밟힌 내 조국 강토를 연합군 장병들이 피를 흘리며 되찾아 준 것처럼, 이번엔 부당한 침략 전쟁에 신음하는 나라를 우리 손으로 돕겠다는 뜻이었다.
몽클라르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국으로 떠날 때 아직 뱃속에 있던 아들(그는 결혼을 늦게 했다)을 위해 이런 편지를 남겼다고 한다.
“사랑하는 아들아. 언젠가 너는 내가 한국으로 떠나야 했던 이유를 물을 것이다. 너와 같은 한국의 아이들이 길에서, 진흙 속에서, 눈 속에서 헤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버지는 여기에 왔단다.”
칠흙같이 어둡고 얼음처럼 차갑던 겨울밤. 죽음의 공포와 포위의 두려움을 이겨 내고 프랑스 대대는 총을 든 적을 향해 대검을 꽂고 돌격했다. 그 용기의 원천은 다름 아닌 숭고한 ‘인류애’였다.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의 끈질긴 침공을 방어한 왕립공군 조종사들을 기리며 윈스턴 처칠은 말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적은 사람들에게, 이토록 큰 빚을 진 적은 없었다(Never was so much owed by so many to so few).” 지금 우리의 생존과 번영 또한, 75년 전 이름도 모르는 나라의 참화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어 중공군의 야심을 분쇄한 지평리 참전 용사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육군 제7기동군단 장병들이 2010년 5월 26일 경기 양평군 지평리에서 한국전쟁 당시 지평리 전투를 재연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기사 작성에 참고한 자료
<몽클라르의 행적 및 일화>
-Kenneth Hamburger ‘Leadership in the Crucible: the Korean War Battles of Twin Tunnels & Chipyong-ni’
-Stéphane Gaudin ‘IN MEMORIAM: Général Raoul Magrin-Vernerey, alias ‘Monclar’, compagnon de la Libération’
-ROK Drop(블로그) ‘Heroes of the Korean War: Lieutenant Colonel Ralph Monclar’
-박민식 국가보훈처장 ‘지평지구 전적지 참배 및 몽클라르 장군 지휘봉 전달식 추모사’
-파비안 몽클라르 ‘한국을 지킨 자유의 전사-나의 아버지 몽클라르 장군’
<프랑스 참전 관련>
-국가보훈부 유엔참전용사 디지털 아카이브 ‘한국에서의 유엔 프랑스대대’
-이명환 ‘프랑스의 한국전쟁 참전과 유엔군-프랑스 보병대대의 작전’
-유엔평화기념관 ‘참 싸움꾼-프랑스 대대 참전 용사들’
-엄현섭 ‘한국전쟁의 기억과 강원도-주르네 회고록을 중심으로’
-Laurent Quisefit ‘The French Participation in the Korean War and the Establishment of a Path of Memory in South Korea’
-Le Figaro 2023년 7월 23일자 ‘La mémoire oubliés du bataillon français’
<지평리 전투 관련>
-김려실 ‘적의 죽음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지평리 전투에 관한 한국의 문화기억 분석’
-김영환 ‘중공군 제4차 공세에 관한 주요 쟁점과 평가’
-김원재 ‘지평리 전투 간 유엔군 항공력 운용에 관한 고찰’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박동찬 ‘6·25전쟁기 공산군의 제4차 공세와 지평지구 전투 재조명’
-조선일보 2025년 6월 26일자 ‘中교수 “마오쩌둥, 지평리 전투 패배 후 정전협상 고려”’
-Russell A. Gugeler ‘Combat Action in Korea’
-Roy Appleman ‘Ridgway Duels for Korea’
<6·25 당시 미육군 편제>
-Donald W Boose, Jr. ‘US Army Forces in the Korean 1950-53’
이영창 논설위원 anti092@hankookilbo.com 기자 admin@gamemong.info
6.25 전쟁 75주년 기획 ‘명장’은 대한민국을 구한 장군들의 ‘가장 빛나던 순간’을 조명합니다. 총체적 난국을 타개하고 전황을 뒤집은 리더십의 성공 비결을 알아봅니다.
외인부대 재직 시절의 랄프 몽클라르 장군. 아들 롤랑 몽클라르 소장
“한국엔 저를 보내 주십시오.”
1950년 8월 프랑스 파리 국방부 청사. 별 넷 장군(프랑스군은 중장이 4성)이 막스 오리지널골드몽 르죈 국방차관과 클레망 블랑 육군참모총장을 열심히 설득하고 있었다. 두 달 전 전화에 휩싸인 한국에 유엔 이름으로 군대를 보내야 하는데, 명색이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프랑스가 약한 부대를 내세우긴 면구스러웠다. 게다가 1940년 나치 독일에 항복한 뒤 프랑스가 처음 보내는 해외 파병이다. 세상은 독일 기갑부대의 낫질 작전(아르덴 숲 돌파)에 허무하게 당하며 모바일바다이야기하는법 6주 만에 두 손 든 ‘유약한 프랑스군’만 기억했다. 군사강국 이미지를 다시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확실한 군사적 성과를 거둘 유능한 지휘관을 골라야 했다.
“저는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았습니다. 아이에게 아버지가 첫 유엔군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
장군은 설 바다신2게임 득을 이어갔다. ‘이 사람 혹시 전쟁광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도록 싸우고 싶어 안달난 장군. 그는 정년을 눈앞에 둔 58세 육군 중장 라울 마그랭 베르느레다. 2차대전 레지스탕스 활동을 할 때 신분을 숨기려고 만든 가명, ‘랄프 몽클라르’로 더 잘 알려진 프랑스 외인부대 장성이다.
프랑스 정부는 한국에 대대급 부대를 보내기로 한 터였다. 바다이야기 1,000명 정도 파병부대엔 장군이 맡을 보직이 없었다. 계급으로 보면 몽클라르는 대대가 아니라 군단(corps)을 지휘하는 중장(général de corps d'armée)이었다. 당연히 국방차관은 “중령이 갈 자리”라며 몽클라르의 주장을 일축했다. 그랬더니 몽클라르는 이렇게 제안했다.
“그렇다면 중령이라도 좋습 백경게임랜드 니다. 계급을 깎겠습니다.”
몽클라르는 군생활 마지막을 전장에서 정리하고 싶었고, 프랑스 정부는 한국에 작지만 구성이 알찬 지상군을 보내고 싶었다. 자발적 강등은 둘 다 만족할 수 있는 묘안이었다. 국방부나 육군참모부 입장에선, 몽클라르가 그래 주기만 한다면야 나쁠 게 없었다. 몽클라르는 샤를 드골 못지않은 전쟁 영웅이었으니까. 1차대전 때 일곱 차례 부상을 입고 열 번이나 훈장과 표창을 받으며 맹활약했다. 전간기 북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서 많은 전투 경험을 쌓았고, 1940년엔 노르웨이 나르비크에서 지상군을 이끌며 2차대전 초반(1939·1940년) 프랑스군의 유일한 승리를 고국에 바쳤다. 북아프리카에선 에리트리아 주둔 이탈리아군을 공략해 해군 제독 등 다수 장성을 포함한 1만4,000명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랄프 몽클라르 이력. 박종범 기자
“몽클라르의 군복에는 프랑스 정부가 줄 수 있는 모든 훈장이 다 달려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프랑스 참전 부대를 이끄는 영광을 선택했다.”
(미국 언론인 겸 작가 조지프 굴든)
왜 중장은 스스로 중령이 됐나
국가적 영웅이었던 중장이 갑자기 네 계급을 낮춰 중령이 된 경위를 파악하려면, 프랑스가 왜 한국에 대대급 병력을 보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당시 프랑스 처지는 복잡했다. 아직 2차대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공산당과 사회주의 세력이 강해 반공국가 남한을 돕는 파병에 부정적 시선이 존재했다.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가 1950년 6월 26일 “미국 꼭두각시 이승만 정부가 국경선에서 공격을 감행했다”며 북침을 주장할 정도였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미소 냉전은 이미 사상계에까지 영향을 미쳐,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프랑스의 지성계도 북한 편(북침 주장)과 남한 편(남침 주장)으로 양분됐다. 실존주의의 대가이자 프랑스 현대철학의 태두 장 폴 사르트르는 소련에 경도돼 북한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현상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절친한 친구 사르트르와 한국전쟁을 계기로 사이가 틀어지는데, 메를로퐁티는 한국의 전쟁 소식을 듣고 소련과 스탈린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사르트르는 메를로퐁티와 사이가 멀어진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여름이 왔고, 한국에서 전쟁이 시작됐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 의견은 일치되지 못했다. 8월에 다시 만났지만 균열만이 있었다. 이미 굳어진 우리 생각은 서로 소통될 수 없었다.”
프랑스 현대철학의 거두 장 폴 사르트르. 한국일보 자료사진
당시 프랑스가 극복하기 어려웠던 가장 현실적인 장애물은 이미 식민지 인도차이나에서 호찌민의 베트민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년)이다. 베트남에 보낸 병력이 8만 명을 넘어섰고, 국방예산 4분의 1을 인도차이나에 쏟아붓고 있었다. 그래서 애초 프랑스 정부는 한국에 전투병 대신 옵서버(장교단)만 보내는 정도로 면피를 하려 했는데, 유엔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전투 구경만 하는 장교단 파견을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결국 당시 군사적 여력, 2차대전 때 미국·영국에 진 빚, 상임이사국의 책임감, 국내 반대 여론 등 여러 상충된 요소를 감안한 결과가 ‘1개 대대 파병’이었다. 야전군 이상 대규모 인원을 상시 주둔시킨 미국, 여단급 부대 이상을 보낸 영국 캐나다 튀르키예에 비해 규모가 확실히 작았고, 태국 필리핀 벨기에 그리스 네덜란드 콜롬비아 에티오피아(이상 1개 대대)와 비슷했다.
그러나 크지 않았던 프랑스군의 존재감을 높여준 것은 단연 사령관 몽클라르였다. 지상군 총사령관 매슈 리지웨이와 계급이 같았고 나이는 세 살이 더 많았던 몽클라르는 중령 계급장을 달고 미군 대령(연대장)에게 복종했지만, 작전 이외 문제에선 어딜 가나 장군 예우를 받았다.
막스 르죈(왼쪽에서 네 번째 양복 입은 인물) 프랑스 국방차관과 랄프 몽클라르 장군이 1950년 9월 르망 인근 오부르 기지에서 파병 장병들의 장비를 점검하고 있다. 주한프랑스대사관 '프랑스대대 사진집'
“프랑스에서 우세하던 이데올로기는 파병에 반대했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전쟁이었기 때문이었죠. 당시 프랑스 공산당은 사회에서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했어요.”
(한국전쟁 참전용사 클로드 마시카르의 '르 피가로' 인터뷰)
프랑스 대대가 전원 지원자로 구성된 정예였다는 점도 특이하다. 기록으로 보면 지원자 대부분 공산주의에 반감을 가졌던 것으로 나오지만, 저마다의 지원 이유는 무척 다양했다. 영어를 배울 수 있겠다며, 해외 생활을 해 보고 싶어서, 개인적 모험을 위해,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보려고, 돈을 벌 목적으로, 그들은 한국에 왔다. 인도차이나보다 더 날씨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온 지원자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순히 세계 지도를 보면 서울이 니스나 마르세유보다 위도가 훨씬 낮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도만 보고 대륙 동안의 혹독한 기후를 간과했던 지원자들은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한반도의 북극 추위를 맛봐야 했다.
그렇게 다양한 사연을 품은 1,017명 장병이 1950년 10월 25일 마르세유에서 한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한국 파병에 대한 좌파 진영의 반감은 여전해, 당시 마르세유 항구 노동자들은 파병군이 타고 갈 수송선을 파손하려고 했다. 군인들은 이에 반발해 파병 반대 기사를 게재한 마르세유 지역 좌파 일간지 ‘라 마르세예즈’ 건물을 급습하기도 했다. 좌우 대결의 불안한 긴장감 속에서, 프랑스 대대는 대낮에 국민들 환송을 받지 못하고 야밤에 항구를 떠나야 했다.
한 달이 넘게 걸린 긴 항해 끝에, 프랑스 대대는 1950년 11월 29일 부산에 도착했다. 당시는 남북통일의 꿈이 중공군 개입으로 무산된 직후였다. 중공군은 두 차례 공세를 통해 유엔군을 청천강 남쪽으로 몰아내고 평양 수복을 시도하고 있었다. 프랑스 대대 일부 병사들은 ‘이렇게 중공군에 계속 밀리면 우리가 전투에 참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프랑스 대대는 일단 미 8군사령부가 위치한 대구로 이동해 무기·장비를 보급받은 뒤, 미군 무기와 작전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계속했다. 그리고 12월 11일 미 2사단 23보병연대에 배속됐다. 수원 충주 단양 횡성을 거쳐, 1951년 1월 원주로 이동해 첫 전투를 치른다. 원주-양평 사이 철도 터널이 두 개 연속으로 뚫린 지역에서 ‘쌍터널 전투’를 승리로 장식한 뒤, 드디어 한국전쟁 흐름을 완전히 뒤바꾼 운명의 싸움이 펼쳐질 경기 양평군 지평리 마을에 도착했다. 1951년 2월 3일이다.
“매슈 리지웨이가 꿈꾸던 전투가 마침내 지평리에서 벌어졌다.”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윈터'
6.25 전쟁에 개입한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 대병력이 압록강을 넘고 있다. 이 사진은 1958년 북한에서 발간된 기념 책자에 실린 사진을 스캔한 것이다. 위키미디어 커먼즈
지평리로 모이는 검은 기운
지평리 전투(1951년 2월 13~16일)는 중공군 4차 공세(2월 11~18일) 기간 중 치러진 가장 중요한 싸움이다. 미군과 프랑스군이 연합한 유엔군 1개 연대전투단(정규 보병연대+포병·방공포·공병 등 소규모 부대)이 중공군 4개 사단에 맞서 최대 1대 10의 병력 열세를 딛고 거둔 승리다
당시 미 23연대전투단이 양평에서 중공군 대병력과 맞서기까지 상황을 살펴본다. 1951년 1월 초는 6·25 전쟁 중 한국이 가장 위기에 몰렸던 시기다. 이때 유엔군은 1·4 후퇴(서울 재함락) 이후 한반도 전면 철수까지 검토하다가, 1월 중순부터 신임 미8군사령관 리지웨이의 공세적 접근(울프하운드·선더볼트 작전) 덕분에 서서히 자신감을 회복했다. 서울을 포기하고 37도선(평택-삼척)까지 밀렸던 유엔군은 2월 들어 한강 유역으로 접근하며 서울 재탈환 준비를 착실하게 하고 있었다.
리지웨이가 3개월 동안 펼친 작전
양평군 남동쪽에 자리한 지평리는 중앙선 철도가 동서로 통과하고, 서울행 도로와 춘천·충주행 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유엔군 입장에선 공산군의 좌우 이동을 차단하면서 광주 쪽에 주둔한 중공군 병력을 견제할 수 있는 양수겸장 요지였다.
리지웨이는 이 지평리 사수 임무를 미 2사단 23연대전투단에 맡겼다. 23연대전투단은 23보병연대에 야포대대, 특공중대, 고사포포대, 전투공병중대 등을 결합해 일반 보병연대보다 월등한 화력을 자랑했다. 당시 미 육군 보병연대는 통상 3개 보병대대, 1개 본부중대, 1개 지원중대, 1개 기갑중대, 1개 박격포중대, 1개 의무중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23연대전투단은 여기에 더해 155㎜ 곡사포 6문, 105㎜ 포 18문, 1개 중대급 대공화기, 전차 20대, 박격포 50문을 추가 보유했다.
그리고 백전노장 몽클라르가 이끄는 프랑스 대대가 연대전투단 전력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프리먼의 지휘 철학은 ‘부하들이 찾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신념은 지휘관으로서 부하에게 최대한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부하에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고 용기를 북돋는 한마디도 곁들였다. 병사 위에 군림하지 않았고 잘난 체하지 않았다.”
(미 군사사학자 케네스 햄버거)
6.25 전쟁 당시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폴 프리먼 당시 미23연대장. 미 육군
지장 프리먼-용장 몽클라르
지평리에 진을 친 23연대전투단의 지휘관은 폴 프리먼 미 육군 대령(23연대장·나중에 대장 진급)이었다. 이 시점에서 프리먼의 최대 장점은 한국에 파병된 그 어떤 미군 장교보다 중국을 잘 알았다는 것. 필리핀에서 군의관 아들로 태어난 프리먼은 어린 시절 대부분을 동아시아에서 살았고, 장교 임관 후에도 중국에서 여러 차례 근무해 중국어에 능통했다. 당연히 중공군 전술과 특성에 익숙했고, 지평리 근처에서 생포된 중공군 포로를 직접 심문하며 적의 증원 상황을 점검했다.
프리먼의 또 다른 특징은 ‘철저한 준비의 달인’이었다는 점. 2월 3일 지평리에 입성한 그는 공격이 시작되기까지 열흘 동안 지평리 마을을 철벽 요새로 탈바꿈시켰다. 23연대전투단은 낮은 언덕을 잇는 원형 방어진을 치고, 각 방향 참호 앞에 지뢰와 철조망을 촘촘하게 깔아 사주경계를 하며 중공군의 공세에 대비했다. 부대와 부대 사이 빈 공간에는 자동화기를 집중 배치해 화망을 형성했다. 특히 프리먼은 식량과 탄약을 최대한 많이 쌓아 뒀는데, 오히려 비축량이 너무 많아서 프리먼 스스로 ‘이러다 전투가 벌어지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이 생길 수 있겠다’며 걱정할 정도였다. 원형 방어는 퇴로를 스스로 끊고 고립을 자초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유엔군의 우세한 화력과 압도적 공군력(폭격 및 공중보급)을 믿고 23연대전투단은 버티기에 들어갔다.
해야 할 일을 차분하고 정확하게 하는 프리먼은 의외로 ‘용장’ 몽클라르와 궁합이 잘 맞았다. 몽클라르보다 열 다섯 살 어렸던 그는 우방국의 군단장급 노장군을 부하로 들이는 것이 처음엔 껄끄러웠지만, 계급 높은 티를 내지 않았던 몽클라르와 이내 훌륭한 협조 관계를 형성했고 전쟁이 끝나고서도 서로 친구로 남았다.
몽클라르의 최대 장점은 용기와 솔선수범이다. 몽클라르는 ‘지휘관이 항상 전투 현장에 있으면서 부하에게 자신감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름지기 리더라면 조직원과 함께 희생하고 위험, 고난, 피로를 똑같이 나눠야 한다고 여겼다. 몽클라르는 태생적으로 겁이 없어 총탄·포탄 소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참호에서는 고개를 숙이지 않고 언제나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며 이동했다.
그는 아들뻘보다도 더 어린 병사들의 사기를 세심하게 챙겼고, 병사들 사기를 높일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제서야 장군의 권위를 이용해 본국에 강하게 요청했다. 한국에서 몽클라르가 즐겨 했던 말은 “사기를 높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meal(식사)이고 다른 하나는 mail(편지)”이라는 얘기다. 프랑스 대대 조리병은 “장군님이 항상 뒤에 서서 음식 만드는 걸 감시하신다”고 푸념했고, 우편 담당 장교(소위)는 돈을 아끼겠다고 빠른 우편 대신 일반 우편으로 본국에 편지를 보내다가 몽클라르에게 호된 질책을 당하기도 했다.
“프랑스군은 군인에게 적용할 수 있는 어떤 기준으로 봐도 이 전쟁에서 최상의 군대였다. 미군은 땅 파기를 싫어해 참호를 얕게 팠지만, 프랑스 병사들은 누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깊게 팠다.
(미국 잡지 '새터데이 이브닐 포스지'의 해럴드 마틴 기자)
지평리 전투 개요도. 박종범 기자
프랑스 대대의 맹활약
때마침 운명의 전장 지평리에서 미군 지장과 프랑스 용장이 합심하여 버티고 있었던 것은 유엔군에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원형 교두보 안에서 방어하던 유엔군은 약 5,400명, 주변을 포위한 중공군 병력은 수만 명에 이르렀다. 기록에 따라 중공군 병력 규모에는 차이가 있는데, 지평리 전투 기록을 가장 상세하게 남긴 전사가 케네스 햄버거의 집계에 따르면 △미 공식 전사에선 6개 연대 △한국전쟁 참전 전사가 로이 애플먼의 기록으론 4개 사단+1개 연대 △현장에 있던 프리먼의 추정으론 5개 사단에 이르렀다. 대략 3, 4개 사단 정도가 공격에 나섰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중공군 총병력은 최소 1만8,000명에서 최대 7만 명 수준이었다. 중공군이 유엔군에 비해 병력 면에서 네 배에서 열 배 정도 우세했던 셈이다.
유엔군의 원형 방어망은 4개 보병대대(미국 3+프랑스 1)가 사방을 한쪽씩 맡아 고정진지를 구축하고, 포병과 예비대가 내부에서 보병을 지원하는 구조였다. 북쪽은 23연대 1대대, 동쪽은 3대대, 남쪽을 2대대가 방어했고, 가장 방어선이 길고 유일한 개활지(논)였던 서쪽(7시~11시 방향)을 프랑스 대대가 담당했다. 프랑스 대대 소속 4개 보병중대 중 1개는 한국인 중대였다.
지평리 전투는 첫 공격 시작 시점인 2월 13일 오후 5시 30분부터, 유엔군 증원부대(미 5기병연대 크롬베즈 특임대)가 중공군 포위를 뚫어낸 15일 오후 5시 15분까지 48시간 내내 거의 쉴 틈 없이 이어졌다. 용장 밑에 약졸 없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프랑스군은 첫날부터 대병력의 기세에 밀리지 않으며 감투정신을 십분 발휘했다. 중공군 1개 소대가 참호로 접근하자, 프랑스 1개 분대가 철모를 벗은 뒤 빨간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착검 돌격(백병전)을 감행했는데, 이 기세에 눌린 중공군이 혼비백산하고 후퇴했고 프랑스군은 이를 추격해 15명의 포로를 생포했다.
14일 밤부터 15일 아침 사이 유엔군의 최대 위기가 찾아왔다. 미군 2대대가 담당하는 남쪽 방어선에 10분 간격으로 중공군의 제파 공격(특정 지점에 여러 공격 부대를 연속 투입)이 이뤄지면서 결국 방어선 일부가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 2대대의 오른쪽 인접부대인 프랑스 대대는 후퇴하지 않고 양면에서 중공군 공격을 버티며 진지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15일 미군의 첫 구원부대가 남쪽 산을 넘어 방어선 진입에 성공하고 후속 부대가 16일 속속 진입하면서, 만 사흘에 걸친 지평리 전투가 유엔군 승리로 막을 내렸다. 유엔군 전사자 52명, 중공군 전사자 4,946명(중국 측 2,000명 주장)으로 적 사망이 아군의 100배에 달하는 대첩이었다.
지평리 전투 장면을 그린 미군의 포스터. 미 육군
“우리는 출동했고 승리했다. 그러나 지평리가 해결되지 않았다.”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의 회고)
지평리 전투의 의미
어떤 의미에선 한국전쟁을 ‘지평리 이전’과 ‘지평리 이후’로 양분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승전의 파급효과는 컸다. 대패한 중공군은 이 전투 하나 때문에 4차 공세를 전체를 날려 버렸고, 다음 일제공격인 5차 공세(4월 22일 시작)까지 두 달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중공군이 움츠린 동안 국군과 유엔군은 △킬러 작전(한강 남안 도달) △리퍼 작전(서울 재탈환) △커레이저스 작전(38선 도달) △러기드 작전(38선 이북 진격)을 차례로 성공시키며, 전세를 확실하게 뒤집었다.
유엔군 입장에서 지평리 전투는 중국의 한반도 개입(1950년 10월 25일 1차공세) 이후 4개월 만에 ‘신출귀몰 중공군’을 상대로 거둔 첫 번째 승리였다. 가위눌렸던 유엔군은 ‘확신을 가지고 우세한 화력을 계속 집중하면 중공군 파상공세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마침내 패배주의를 극복할 수 있었다.
마오쩌둥과 김일성 입장에선 단순한 병력 손실 이상의 큰 타격이었다. 냉전 후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당시 마오쩌둥 정부는 이 패전을 계기로 미국의 화력을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고 사실상 한반도 전체 점령 계획을 포기했다. 올해 6월 6·25전쟁 75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위해 방한한 선즈화 중국 화둥사범대 교수는 “중국이 한반도 파병 이래 엄중한 타격을 입은 첫 전투이자 전환점”이라며 “중공군이 이기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된 계기”라고 지평리의 의미를 풀이했다. 한반도 철수를 염두에 뒀던 미국이 자신감을 얻고, 반대로 한반도를 모두 점령할 수 있다고 자부했던 중국의 기세가 확 꺾이면서, 6·25전쟁은 지평리를 계기로 ‘정전협상에 의한 해결’ 쪽으로 급격하게 무게 추가 쏠렸다.
몽클라르와 프랑스 대대가 이 전투의 승리의 1등 공신이라고까지는 보기 어렵지만, 프랑스군의 감투정신이 없었다면 지평리 전투 승리가 어려웠을 것이란 점엔 별다른 이견이 없다. 당시 군단장과 사단장의 철수 요청을 거절하고 지평리 절대 사수 방침을 밝혔던 리지웨이는 1952년 미 의회 연설에서 “영하의 날씨에 완벽하게 포위된 23연대와 프랑스 대대는 수적으로 절대 우세한 적의 계속된 공격을 밤낮으로 격퇴했다”며 “두 나라의 가장 최고 군인들이 형제애를 가지고 최고의 업적을 쌓았다”고 평가했다.
“우리는 문명과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한국에 가야 한다.”
(몽클라르가 한국 참전 지원자를 모을 때 했던 연설)
한국전쟁 참전 유엔군 주요국 사상자. 박종범 기자
계급을 깎으면서까지 해외 파병에 합류한 장군, 100% 지원자로 이뤄진 장교와 사병. 프랑스 대대는 규모는 작았지만 16개 유엔 참전국 소속 군대 중에서 가장 투지 넘치게 싸웠던 부대로 손꼽힌다. 프리먼 후임으로 23연대장 자리를 이어받은 존 차일스 대령은 “프랑스군은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며 “그들은 자기 위치를 유지했고, 언제나 목표를 수행했으며,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고 칭찬했다. 프랑스 대대엔 3년 동안 연인원 3,421명이 거쳐갔고, 이 중 1,289명이 죽거나 다쳤다. 사상자 비율이 37.7%에 달하는데, 이는 전체 참전군 사상자 비율(7.7%)의 다섯 배에 가까운 수준이다.
다른 나라 부대에 비해 파병 기간이 길었다는 점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겠지만, 프랑스 대대가 목숨을 아끼지 않은 것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을 한국으로 이끈 동기가 매우 고결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일부 장교와 병사들은 “우린 한국이란 나라를 모르지만, 그 나라의 자유를 지키러 간다”고 말했다. 2차대전 당시 독일에 짓밟힌 내 조국 강토를 연합군 장병들이 피를 흘리며 되찾아 준 것처럼, 이번엔 부당한 침략 전쟁에 신음하는 나라를 우리 손으로 돕겠다는 뜻이었다.
몽클라르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국으로 떠날 때 아직 뱃속에 있던 아들(그는 결혼을 늦게 했다)을 위해 이런 편지를 남겼다고 한다.
“사랑하는 아들아. 언젠가 너는 내가 한국으로 떠나야 했던 이유를 물을 것이다. 너와 같은 한국의 아이들이 길에서, 진흙 속에서, 눈 속에서 헤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버지는 여기에 왔단다.”
칠흙같이 어둡고 얼음처럼 차갑던 겨울밤. 죽음의 공포와 포위의 두려움을 이겨 내고 프랑스 대대는 총을 든 적을 향해 대검을 꽂고 돌격했다. 그 용기의 원천은 다름 아닌 숭고한 ‘인류애’였다.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의 끈질긴 침공을 방어한 왕립공군 조종사들을 기리며 윈스턴 처칠은 말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적은 사람들에게, 이토록 큰 빚을 진 적은 없었다(Never was so much owed by so many to so few).” 지금 우리의 생존과 번영 또한, 75년 전 이름도 모르는 나라의 참화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어 중공군의 야심을 분쇄한 지평리 참전 용사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육군 제7기동군단 장병들이 2010년 5월 26일 경기 양평군 지평리에서 한국전쟁 당시 지평리 전투를 재연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기사 작성에 참고한 자료
<몽클라르의 행적 및 일화>
-Kenneth Hamburger ‘Leadership in the Crucible: the Korean War Battles of Twin Tunnels & Chipyong-ni’
-Stéphane Gaudin ‘IN MEMORIAM: Général Raoul Magrin-Vernerey, alias ‘Monclar’, compagnon de la Libération’
-ROK Drop(블로그) ‘Heroes of the Korean War: Lieutenant Colonel Ralph Monclar’
-박민식 국가보훈처장 ‘지평지구 전적지 참배 및 몽클라르 장군 지휘봉 전달식 추모사’
-파비안 몽클라르 ‘한국을 지킨 자유의 전사-나의 아버지 몽클라르 장군’
<프랑스 참전 관련>
-국가보훈부 유엔참전용사 디지털 아카이브 ‘한국에서의 유엔 프랑스대대’
-이명환 ‘프랑스의 한국전쟁 참전과 유엔군-프랑스 보병대대의 작전’
-유엔평화기념관 ‘참 싸움꾼-프랑스 대대 참전 용사들’
-엄현섭 ‘한국전쟁의 기억과 강원도-주르네 회고록을 중심으로’
-Laurent Quisefit ‘The French Participation in the Korean War and the Establishment of a Path of Memory in South Korea’
-Le Figaro 2023년 7월 23일자 ‘La mémoire oubliés du bataillon français’
<지평리 전투 관련>
-김려실 ‘적의 죽음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지평리 전투에 관한 한국의 문화기억 분석’
-김영환 ‘중공군 제4차 공세에 관한 주요 쟁점과 평가’
-김원재 ‘지평리 전투 간 유엔군 항공력 운용에 관한 고찰’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박동찬 ‘6·25전쟁기 공산군의 제4차 공세와 지평지구 전투 재조명’
-조선일보 2025년 6월 26일자 ‘中교수 “마오쩌둥, 지평리 전투 패배 후 정전협상 고려”’
-Russell A. Gugeler ‘Combat Action in Korea’
-Roy Appleman ‘Ridgway Duels for Korea’
<6·25 당시 미육군 편제>
-Donald W Boose, Jr. ‘US Army Forces in the Korean 1950-53’
이영창 논설위원 anti092@hankookilbo.com 기자 admin@gamemong.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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