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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slotnara.info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정권은 교육의 방향과 국민정신의 기초를 세운다는 목적으로 ‘국민교육헌장’을 만들었다. 사진은 1968년 12월5일 진행된 국민교육헌장 선포식의 한 장면. 한국정책방송원 제공
지난 한 세기에 걸쳐 한국에서는 어떤 철학적 사상들이 펼쳐졌을까. 현대 한국 철학의 100년을 찬찬히 음미해보고자 한다. 이런 음미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철학적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남겨진 철학적 자산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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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암 박종홍에게서 창조란 무엇보다도 우선 새로운 역사의 창조를 뜻한다. 이런 그의 사유 맥락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곧 주체(성)의 문제이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자 할 때 그 창조의 주체를 개념화하는 것이야말로 중차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곧 주체(성)의 개념을 정립하고 그 위에서 새로운 역사의 창조에 대해 사유하는 바다이야기#릴게임 정치철학·역사철학적 작업을 요청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열암은 그의 논리학 체계에 걸맞은 정치철학과 역사철학을 남기지는 못했다. 논리학 체계는 비록 미완성이더라도 남겨진 부분 그 자체로서 묵직한 성과를 이루고 있지만, 체계적인 정치철학과 역사철학은 아예 시도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박정희 정권에의 참여라는 ‘실천’만을 게임몰 남기게 된다. 그러나 그가 남긴 저작들의 어떤 부분들(특히 ‘철학 개설’의 서론)이나 상당수에 달하는 짧은 글들에서 그의 역사 이해와 정치적 지향이 어떤 것인지를 충분히 읽어낼 수 있다.
열암의 민족적 주체성 개념은 현대 한국사의 맥락에서 배태된 개념이다. 따라서 이 개념의 이해는 현대 한국의 역사라는 맥락에 입각해 이루어져야 한다. 열암 릴게임무료 은 ‘일제 시대’에 관해 자주 언급했다. 당연하다고 해야 하겠지만, 열암의 글에서는 일제의 지배와 만행에 대한 비판과 성토를 여러 군데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 일제 강점기에 대한 역사적-철학적 분석, 특히 제국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은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언급들은 대개 감성적인 회고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열암은 역사와 정치 황금성게임랜드 에 대해 많은 말과 글을 남겼지만, 그는 애초에 역사의식이나 정치 감각―정치는 사상의 문제이기 이전에 감각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이 다소 둔감했던 인물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하이데거에 관한 글에서 하이데거의 베를린대학 총장 취임을 두고서 “젊은 나이에 총장이 되었다”는 좀 어이가 없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이 심각한 역사적-정치적 사건을 맞이해 언급한다는 것이 속되기가 이를 데 없는 이런 말이었던 것이다. 역사와 정치에 대한 그의 글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런 식의, 역사적-철학적 핵심에 육박하는 것이 아니라 안이하고 겉도는 언급들을 심심찮게 발견하게 된다. 이 점은 자신의 사유 역량을 제국주의에 대한, 특히 파시즘에 대한 분석에 쏟았고 실제 역사에 몸을 던졌던 (열암의 두 동기 동창인) 박치우, 신남철과 비교된다.
박정희 대통령이 열암 박종홍의 영전에 국민훈장을 추서했다는 내용의 기사. 경향신문 1976년 7월14일자.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갈무리
그러나 다음과 같은 구절은 주목된다. “일본 사람이 한반도에 남겨 놓았던 개화는 정신을 상실한 얼빠진 병신 개화라고나 할까.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진정한 근대화 작업에 있어서 두고두고 근본적으로 완전히 도려내야 할 병근(病根)이 되어 온 것이다. 새로운 추진을 방해하는 암 같은 작용을 하였다고 하겠다.”(‘전집 Ⅵ’, 127) 열암이 추구한 바가 민족적 주체성에 입각한 조국 근대화에 있다고 할 때, 이 구절은 그가 추구한 근대화가 식민지 근대화를 확연하게 떨쳐버린 근대화였음을 확인하게 해준다.
열암은 4·19 혁명에 대한 감격 어린 회고를 그의 저작들 여러 군데에서 피력했다. 특히 그에게 4·19는 그가 지향하는 민족적 주체성의 형성에 중요한 특이점을 형성한다. 그가 4·19에 부여하는 특히 중요한 의미는 이 의거를 통해서 “이 땅에 새로운 창의적인 지성이 싹텄다”는 점이다.(‘전집 Ⅵ’, 190) 이는 곧 열암이 4·19를 그가 추구하는 근대적인 민족적 주체들의 형성에 결정적인 사건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잘 드러낸다. 그리고 이런 형성은 곧 열암 자신이 민족적 주체성을 가슴에 품은 젊은 지식인으로서 탄생한 과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4·19에 관련해서도 열암은 그저 감격을 표할 뿐 자유당 시대에 대한 역사적-철학적 사유를 남기지는 못하고 있다.
열암의 정치적 입장과 실천은 박정희 시대를 맞아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이 시대에 대해 열암이 가진 인식의 기초는 5·16 쿠데타를 4·19 혁명의 연속선상에 놓는 점에 있다. “4·19 혁명도 5·16 혁명도 이 나라 백성의 주체성을 살리자는 것이다. 학생도 군인도 이 백성의 참뜻을 대신하여 궐기한 것이다.”(‘전집 Ⅵ’, 346) 그렇다면 “이 나라 백성의 주체성”, 즉 지금까지 언급했던 민족적 주체성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열암은 주관성과 주체성을 구분한다. 주관성, “관념적인 주관”은 한 인간의 의식의 테두리 내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성은 한 인간이 타자들과 관계 맺으면서 자신의 신체로써 행동할 때에 성립한다. 열암은 이런 주체성 개념을 개인의 차원에서보다는 집단의 차원에서, 그리고 기본적으로 대립의 구도에 입각해 이해한다.
“타자인 객체가 개인이 아니고 그 이상의 힘을 가진 집단으로서의 인간인 경우, 그의 위력은 개인으로서의 주체와 대항하는 것이라기에는 너무나 엄청나게 큰 것이요, 여기에 같은 운명을 걸머지고 같은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국가 민족으로서의 주체를 생각 아니할 수 없게 된다. 경우를 따라서는 그 범위도 넘어서 연합적인 공동 전선을 펴게 되는 것이어서, 가령 공산권에 대한 자유세계가 그의 예라고 하겠다.”(‘전집 Ⅵ’, 109)
여기에서 우리는 열암에게 핵심적인 주체성은 곧 타국들의 위협을 받는 한국이라는 민족국가의 주체성이고 또한 공산권의 위협을 받는 “자유세계”의 주체성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열암의 주체 개념은 이렇게 적대의 구도에 입각해 규정되어 있음을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열암의 민족적 주체성 개념과 굳게 맞물려 있는 것은 곧 근대화의 가치이다. 열암에게서 근대화는 오로지 민족적 주체성에 기반해서만 가능하며, 민족적 주체성은 근대화라는 가치 위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이때 근대화의 내용을 이루는 두 핵은 곧 인간 개조와 경제 계획이다. 열암이 가졌던 근대화의 개념은 (시대를 고려해야 하겠지만) 다소 부박한 것이었다. 그에게 근대화란 과학기술을 진흥시켜 생산·분배·유통에서의 합리화와 효율화를 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이런 길을 위해서는 국민이 근대적인 민족적 주체성을 갖추도록 개조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민족적 주체성은, 계급을 초월한 채 쉽사리 변할 줄 모르는 한국말과 더불어 깊이깊이 그의 뿌리를 한국인의 생활 속에 내리고 있는 것이다. 계급은 이해타산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기 마련이나, 민족의 주체성은 사라지는 법이 없고, 우리의 자각을 통하여 끝끝내 살려서 확립시키는 수밖에 없다. 우리의 민족적 주체성에 있어서 38선은 용납할 수 없는 노릇이다. 남한이니 북한이니 다를 리 없다. 우리의 통일이념은 오직 하나의 민족적 주체성을 같이 살리어 이 겨레로서의 삶의 보람을 함께 느끼는 데 있다.”(‘전집 Ⅵ’, 113)
1961년 5월16일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위키미디어 코먼스
열암의 이런 민족적 주체성 개념이 내포하는 문제점을 우리는 적어도 세가지 측면에서 지적할 수 있다. 우선 열암적 주체성 개념은 한국이라는 민족국가의 주체성일 뿐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개개인의 주체성이 아니었다. 그는 한국이라는 보편자를 전제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채워야 한다고 보았을 뿐, 우선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들이 모임으로써 한국이라는 보편자가 형성될 뿐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아예 한 인간의 존재 이유 그 자체를 민족적 주체성에 입각해 정의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국민교육헌장’) 이런 그의 주체성 개념의 뒤에는 그의 박정희 정권에의 참여가, 국가를 실체화해 민족의 이름으로 ‘국민’들을 통치하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유신을 강력하게 긍정했으며 박정희를 ‘지도자’로 내세웠고, “우리는 유신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단언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열암의 사유가 민족적 주체성이라는 동일자에 집착함으로써, 바로 그 동일자 안에 엄존하는 분열과 갈등을 무시하고 희석화했다는 점이다. 다자를 하나로 묶어서 어떤 동일자로 만들 때, 다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 그리고 그 차이들이 내포하는 분열과 갈등은 그 동일자의 하나-임에 복속되어 버린다. 국가나 민족은 이런 동일자들 중 하나이며, 정치적으로 특히나 중요하고 예민한 동일자이다. 박종홍은 박치우와 대조적으로 이런 동일자의 허구성과 폭력을 비판하는 길이 아니라 특정한 동일자로서의 민족적 주체성을 집요하게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바로 그랬기에 그는 민족적 주체성이라는 동일자 내에서 생성하는 차이들의 분열과 갈등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해하지 못했던 이 분열과 갈등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것이 한두가지는 아니었겠거니와, 그 결정적인 것은 바로 계급적인 분열과 갈등이었다. 열암이 활동하던 시대는 바로 근대화의 시대, 공업화의 시대, ‘개발독재’의 시대였고, 이 시대의 심장부에는 바로 노동의 개념이, 노동자라는 존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열암은 시대정신을 담지했던 이 결정적인 문제를 “계급은 이해타산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기 마련이나, 민족의 주체성은 사라지는 법이 없고, (…)”라고 말하면서, 민족의 주체성을 항구적으로 실체화하는 동시에 계급을 그저 ‘이해타산’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치부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자신이 살아가던 시대의 시대정신에 얼마나 둔감하고 무지했는지, 아니면 그 반대로 (파시스트로서 절박한 위협을 느꼈기에) 얼마나 덮고 싶어 했는지를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그의 편협한 반공이데올로기에 있다. 위 인용문에서는 “남한이니 북한이니 다를 리 없다”라고 하고 있지만 이는 예외적인 경우이며, 그의 저작들에는 거의 병적이다 싶을 정도로 그리고 자주 철학자답지 않은 감정적인 표현으로 반공이데올로기가 미만해 있다. 이는 매우 묘하다. 그의 실천철학적 핵심이 민족적 주체성에 있을진대, 민족의 반쪽을 어떻게 포용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 무조건적으로 적대하는 것은 자기모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의 정치적 사유의 핵심은 사실 민족에 있다기보다 국가에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열암은 민족적 주체성을 외쳤지만, 사실 그는 남한의 국가적 주체성을 역설한 것이며, 결국 그의 정치적 사유는 박정희 독재정권의 나팔수 바로 그것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정우 철학자
철학자 이정우 l 서울대학교에서 미셸 푸코로 학위를 받았다. 대안공간 철학아카데미에서 시민 강좌를 열었고, 지금은 소운서원에서 후학 양성과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세계철학사’ 4부작(2011~2024)을 펴냈고, 현재는 ‘소운 철학 대계’를 집필하고 있다.
철학자 이정우
지난 한 세기에 걸쳐 한국에서는 어떤 철학적 사상들이 펼쳐졌을까. 현대 한국 철학의 100년을 찬찬히 음미해보고자 한다. 이런 음미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철학적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남겨진 철학적 자산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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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암 박종홍에게서 창조란 무엇보다도 우선 새로운 역사의 창조를 뜻한다. 이런 그의 사유 맥락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곧 주체(성)의 문제이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자 할 때 그 창조의 주체를 개념화하는 것이야말로 중차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곧 주체(성)의 개념을 정립하고 그 위에서 새로운 역사의 창조에 대해 사유하는 바다이야기#릴게임 정치철학·역사철학적 작업을 요청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열암은 그의 논리학 체계에 걸맞은 정치철학과 역사철학을 남기지는 못했다. 논리학 체계는 비록 미완성이더라도 남겨진 부분 그 자체로서 묵직한 성과를 이루고 있지만, 체계적인 정치철학과 역사철학은 아예 시도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박정희 정권에의 참여라는 ‘실천’만을 게임몰 남기게 된다. 그러나 그가 남긴 저작들의 어떤 부분들(특히 ‘철학 개설’의 서론)이나 상당수에 달하는 짧은 글들에서 그의 역사 이해와 정치적 지향이 어떤 것인지를 충분히 읽어낼 수 있다.
열암의 민족적 주체성 개념은 현대 한국사의 맥락에서 배태된 개념이다. 따라서 이 개념의 이해는 현대 한국의 역사라는 맥락에 입각해 이루어져야 한다. 열암 릴게임무료 은 ‘일제 시대’에 관해 자주 언급했다. 당연하다고 해야 하겠지만, 열암의 글에서는 일제의 지배와 만행에 대한 비판과 성토를 여러 군데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 일제 강점기에 대한 역사적-철학적 분석, 특히 제국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은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언급들은 대개 감성적인 회고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열암은 역사와 정치 황금성게임랜드 에 대해 많은 말과 글을 남겼지만, 그는 애초에 역사의식이나 정치 감각―정치는 사상의 문제이기 이전에 감각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이 다소 둔감했던 인물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하이데거에 관한 글에서 하이데거의 베를린대학 총장 취임을 두고서 “젊은 나이에 총장이 되었다”는 좀 어이가 없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이 심각한 역사적-정치적 사건을 맞이해 언급한다는 것이 속되기가 이를 데 없는 이런 말이었던 것이다. 역사와 정치에 대한 그의 글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런 식의, 역사적-철학적 핵심에 육박하는 것이 아니라 안이하고 겉도는 언급들을 심심찮게 발견하게 된다. 이 점은 자신의 사유 역량을 제국주의에 대한, 특히 파시즘에 대한 분석에 쏟았고 실제 역사에 몸을 던졌던 (열암의 두 동기 동창인) 박치우, 신남철과 비교된다.
박정희 대통령이 열암 박종홍의 영전에 국민훈장을 추서했다는 내용의 기사. 경향신문 1976년 7월14일자.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갈무리
그러나 다음과 같은 구절은 주목된다. “일본 사람이 한반도에 남겨 놓았던 개화는 정신을 상실한 얼빠진 병신 개화라고나 할까.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진정한 근대화 작업에 있어서 두고두고 근본적으로 완전히 도려내야 할 병근(病根)이 되어 온 것이다. 새로운 추진을 방해하는 암 같은 작용을 하였다고 하겠다.”(‘전집 Ⅵ’, 127) 열암이 추구한 바가 민족적 주체성에 입각한 조국 근대화에 있다고 할 때, 이 구절은 그가 추구한 근대화가 식민지 근대화를 확연하게 떨쳐버린 근대화였음을 확인하게 해준다.
열암은 4·19 혁명에 대한 감격 어린 회고를 그의 저작들 여러 군데에서 피력했다. 특히 그에게 4·19는 그가 지향하는 민족적 주체성의 형성에 중요한 특이점을 형성한다. 그가 4·19에 부여하는 특히 중요한 의미는 이 의거를 통해서 “이 땅에 새로운 창의적인 지성이 싹텄다”는 점이다.(‘전집 Ⅵ’, 190) 이는 곧 열암이 4·19를 그가 추구하는 근대적인 민족적 주체들의 형성에 결정적인 사건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잘 드러낸다. 그리고 이런 형성은 곧 열암 자신이 민족적 주체성을 가슴에 품은 젊은 지식인으로서 탄생한 과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4·19에 관련해서도 열암은 그저 감격을 표할 뿐 자유당 시대에 대한 역사적-철학적 사유를 남기지는 못하고 있다.
열암의 정치적 입장과 실천은 박정희 시대를 맞아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이 시대에 대해 열암이 가진 인식의 기초는 5·16 쿠데타를 4·19 혁명의 연속선상에 놓는 점에 있다. “4·19 혁명도 5·16 혁명도 이 나라 백성의 주체성을 살리자는 것이다. 학생도 군인도 이 백성의 참뜻을 대신하여 궐기한 것이다.”(‘전집 Ⅵ’, 346) 그렇다면 “이 나라 백성의 주체성”, 즉 지금까지 언급했던 민족적 주체성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열암은 주관성과 주체성을 구분한다. 주관성, “관념적인 주관”은 한 인간의 의식의 테두리 내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성은 한 인간이 타자들과 관계 맺으면서 자신의 신체로써 행동할 때에 성립한다. 열암은 이런 주체성 개념을 개인의 차원에서보다는 집단의 차원에서, 그리고 기본적으로 대립의 구도에 입각해 이해한다.
“타자인 객체가 개인이 아니고 그 이상의 힘을 가진 집단으로서의 인간인 경우, 그의 위력은 개인으로서의 주체와 대항하는 것이라기에는 너무나 엄청나게 큰 것이요, 여기에 같은 운명을 걸머지고 같은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국가 민족으로서의 주체를 생각 아니할 수 없게 된다. 경우를 따라서는 그 범위도 넘어서 연합적인 공동 전선을 펴게 되는 것이어서, 가령 공산권에 대한 자유세계가 그의 예라고 하겠다.”(‘전집 Ⅵ’, 109)
여기에서 우리는 열암에게 핵심적인 주체성은 곧 타국들의 위협을 받는 한국이라는 민족국가의 주체성이고 또한 공산권의 위협을 받는 “자유세계”의 주체성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열암의 주체 개념은 이렇게 적대의 구도에 입각해 규정되어 있음을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열암의 민족적 주체성 개념과 굳게 맞물려 있는 것은 곧 근대화의 가치이다. 열암에게서 근대화는 오로지 민족적 주체성에 기반해서만 가능하며, 민족적 주체성은 근대화라는 가치 위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이때 근대화의 내용을 이루는 두 핵은 곧 인간 개조와 경제 계획이다. 열암이 가졌던 근대화의 개념은 (시대를 고려해야 하겠지만) 다소 부박한 것이었다. 그에게 근대화란 과학기술을 진흥시켜 생산·분배·유통에서의 합리화와 효율화를 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이런 길을 위해서는 국민이 근대적인 민족적 주체성을 갖추도록 개조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민족적 주체성은, 계급을 초월한 채 쉽사리 변할 줄 모르는 한국말과 더불어 깊이깊이 그의 뿌리를 한국인의 생활 속에 내리고 있는 것이다. 계급은 이해타산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기 마련이나, 민족의 주체성은 사라지는 법이 없고, 우리의 자각을 통하여 끝끝내 살려서 확립시키는 수밖에 없다. 우리의 민족적 주체성에 있어서 38선은 용납할 수 없는 노릇이다. 남한이니 북한이니 다를 리 없다. 우리의 통일이념은 오직 하나의 민족적 주체성을 같이 살리어 이 겨레로서의 삶의 보람을 함께 느끼는 데 있다.”(‘전집 Ⅵ’, 113)
1961년 5월16일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위키미디어 코먼스
열암의 이런 민족적 주체성 개념이 내포하는 문제점을 우리는 적어도 세가지 측면에서 지적할 수 있다. 우선 열암적 주체성 개념은 한국이라는 민족국가의 주체성일 뿐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개개인의 주체성이 아니었다. 그는 한국이라는 보편자를 전제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채워야 한다고 보았을 뿐, 우선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들이 모임으로써 한국이라는 보편자가 형성될 뿐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아예 한 인간의 존재 이유 그 자체를 민족적 주체성에 입각해 정의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국민교육헌장’) 이런 그의 주체성 개념의 뒤에는 그의 박정희 정권에의 참여가, 국가를 실체화해 민족의 이름으로 ‘국민’들을 통치하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유신을 강력하게 긍정했으며 박정희를 ‘지도자’로 내세웠고, “우리는 유신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단언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열암의 사유가 민족적 주체성이라는 동일자에 집착함으로써, 바로 그 동일자 안에 엄존하는 분열과 갈등을 무시하고 희석화했다는 점이다. 다자를 하나로 묶어서 어떤 동일자로 만들 때, 다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 그리고 그 차이들이 내포하는 분열과 갈등은 그 동일자의 하나-임에 복속되어 버린다. 국가나 민족은 이런 동일자들 중 하나이며, 정치적으로 특히나 중요하고 예민한 동일자이다. 박종홍은 박치우와 대조적으로 이런 동일자의 허구성과 폭력을 비판하는 길이 아니라 특정한 동일자로서의 민족적 주체성을 집요하게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바로 그랬기에 그는 민족적 주체성이라는 동일자 내에서 생성하는 차이들의 분열과 갈등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해하지 못했던 이 분열과 갈등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것이 한두가지는 아니었겠거니와, 그 결정적인 것은 바로 계급적인 분열과 갈등이었다. 열암이 활동하던 시대는 바로 근대화의 시대, 공업화의 시대, ‘개발독재’의 시대였고, 이 시대의 심장부에는 바로 노동의 개념이, 노동자라는 존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열암은 시대정신을 담지했던 이 결정적인 문제를 “계급은 이해타산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기 마련이나, 민족의 주체성은 사라지는 법이 없고, (…)”라고 말하면서, 민족의 주체성을 항구적으로 실체화하는 동시에 계급을 그저 ‘이해타산’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치부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자신이 살아가던 시대의 시대정신에 얼마나 둔감하고 무지했는지, 아니면 그 반대로 (파시스트로서 절박한 위협을 느꼈기에) 얼마나 덮고 싶어 했는지를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그의 편협한 반공이데올로기에 있다. 위 인용문에서는 “남한이니 북한이니 다를 리 없다”라고 하고 있지만 이는 예외적인 경우이며, 그의 저작들에는 거의 병적이다 싶을 정도로 그리고 자주 철학자답지 않은 감정적인 표현으로 반공이데올로기가 미만해 있다. 이는 매우 묘하다. 그의 실천철학적 핵심이 민족적 주체성에 있을진대, 민족의 반쪽을 어떻게 포용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 무조건적으로 적대하는 것은 자기모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의 정치적 사유의 핵심은 사실 민족에 있다기보다 국가에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열암은 민족적 주체성을 외쳤지만, 사실 그는 남한의 국가적 주체성을 역설한 것이며, 결국 그의 정치적 사유는 박정희 독재정권의 나팔수 바로 그것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정우 철학자
철학자 이정우 l 서울대학교에서 미셸 푸코로 학위를 받았다. 대안공간 철학아카데미에서 시민 강좌를 열었고, 지금은 소운서원에서 후학 양성과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세계철학사’ 4부작(2011~2024)을 펴냈고, 현재는 ‘소운 철학 대계’를 집필하고 있다.
철학자 이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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