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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성내교회 강정길 장로가 2007년 10월 이기풍 목사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하는 모습. /강정길 장로 제공
지난봄부터 ‘한국의 100년 교회를 가다’라는 제목의 기획 기사를 조선일보 지면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올해 개신교 한국 선교 140주년을 맞아 전국의 유서 깊은 교회의 스토리를 소개하는 기획입니다. 덕분에 전국을 다니면서 개신교 초기 역사에 대해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역사가 오래된 교회를 방문하면서 느끼는 점은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교회 역사에 자부심을 가진 교인들을 만나는 것은 큰 보람입니다. 교회의 담임목사는 바뀌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대를 이어 수십 년째 출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분들이 교회를 지키는 분들 대구 직장인밴드 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분들은 교회 역사 편찬을 맡아 전문가 못지않은 열정으로 자료를 섭렵하고 작은 부분까지 기록으로 남기기도 합니다. 팩트에 대해서 매우 엄격하고 사안의 판단에 대해서도 한쪽 면을 부각하기보다는 다양한 측면에서 역사를 다뤄 모든 교인이 수긍하고 인정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주성내교회 강정길 원로 장로님도 그 정신과무료상담 런 분이었습니다.
제주성내교회 강정길 장로의 순례기 '갈 길을 밝혀 주시니' 표지. 강 장로는 2007년 10월 한 달 동안 이기풍 목사의 발자취를 찾아 임진각에서 제주까지 800km를 도보 순례했다.
제주성내교회 강남 집값 취재를 마치고 떠나올 때 강 장로님은 책 한 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갈 길을 밝혀주시니’(쿰란출판사)라는 제목의 여행기였습니다. 표지엔 본인이 배낭을 메고 걷는 모습이 실렸고요. 이 책은 그가 2007년 10월 1일부터 한 달간 임진각에서 제주까지 800㎞를 혼자 도보 순례한 기록이었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제주 선교 100주년을 기념한 순례였습니다. 책 제1금융권무직자대출 은 순례 10년 후인 2017년에 나왔습니다.
한국 장로교 역사상 처음으로 제주도 선교에 나섰던 이기풍 목사.
이기풍 목사는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7명 중 한 명입니다. 이 중소기업기술정보진흥원장 사퇴 기풍 목사는 조선독로회에서 제주 선교사로 파송돼 1908년 제주성내교회를 설립했습니다. 당시 제주도에는 토속 신앙이 성행했고, 선교사에 대한 반감도 심했다고 합니다. 이기풍 목사는 “설러블라 설러블라 경허지 않으면 야가기 끄너 블켜” 즉 “그만두라 그렇지 않으면 목을 베어 놓겠다”는 협박까지 받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전도했다고 하지요.
강 장로의 순례는 평양에서 출발해 제주에 이르는 이기풍 목사의 발자취를 따라 걷겠다는 각오였습니다. 이기풍 목사는 평양에서 서울까지는 기차로 와서 인천항에서 군산을 경유해 목포까지는 범선을 이용했으며, 목포에서 추자도, 추자도에서 제주도 코스도 배로 이동했습니다. 강 장로는 배가 아니라 도보로 이기풍 목사가 제주로 향한 길과 가장 가까운 코스를 택했습니다. 주로 1번 국도를 걸었습니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책장을 넘길수록 서서히 빠져들었습니다. 한때 국내에서도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가 크게 유행했습니다. 여행기도 많이 나왔지요. 또 제주 올레길도 많은 분이 걸었지요. 그런 책들에는 감동적이고 극적인 스토리도 많았습니다.
제주 성내교회/ 김한수 기자
그런 여행기와 비교한다면 강 장로의 책은 극적인 스토리는 없습니다. 순례 과정에서 뭔가 대단한 경험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매일매일 성실하게 한 걸음씩 옮기는 그의 모습을 읽으면서 평범하지만 신실한 한 신앙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국 개신교 140년은 이렇게 차곡차곡 쌓여온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순례 당시 60대 중반이었던 강 장로는 해병대 장교로 전역한 후 평생 고향 제주에서 교편을 잡은 분이었습니다. 제주여고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제주상업고등학교(현 제주중앙고)에서 교장을 지냈습니다. 등단한 수필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순례기에는 쉬운 문장으로 이기풍 목사로 대표되는 초기 개신교의 역사뿐 아니라 그의 삶과 신앙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어떻게 800㎞ 도보 순례를 마음먹게 됐을까요. 그는 ‘차마고도(車馬古道)’라는 TV 프로그램에서 티베트인 세 사람이 라사까지 2100㎞를 6개월에 걸쳐 다섯 걸음 걷고 땅바닥에 몸을 던지는 것을 보면서(엎드렸다가 일어서는 것도 아니고) ‘서서 걸으면서 1개월에 800㎞를 가는 나의 도보 순례는 망설일 이유가 없다’고 다짐했답니다. 그렇게 18년 전 이맘때인 2007년 10월 1일, 순례가 시작됐습니다.
등산복에 등산화, 모자와 배낭, 지팡이 등 걷기 좋은 차림에 배낭에는 좋아하는 찬송가 복사본 10매와 ‘선교 명함’ 200매, 주먹만 한 작은 성경 등으로 8kg 정도의 짐을 꾸렸습니다. 배낭에는 ‘이기풍 목사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 도보 순례-평양(임진각)에서 제주까지’라고 쓴 깃발을 꽂았습니다.
강정길 장로가 본격 순례에 앞서 출발점인 임진각에서 기념촬영했다. /강정길 장로 제공
숙박은 모텔, 식사는 식당에서 해결하기로 정했답니다. 일정은 아침 식사 7시, 성경 낭독(출발 전 매일 한 장), 출발 기도(배낭 메고 방문 안에서), 출발 8시로 정했습니다. 특별히 예정된 일정은 없었습니다. 가는 길에 교회가 보이면 들어가서 “도보 순례 중”이라고 인사하고 선교 명함을 건네고 다시 길을 나서는 식이었습니다. 책은 하루하루 순례의 전 과정을 적은 일기 같은 형식입니다. 중간중간에 올렸던 기도와 찬송, 묵상이 풍경화처럼 펼쳐집니다.
횡단보도가 없는 길에서는 “하나님! 이런 때는 한 번만 눈감아 주십시오” 하면서 무단 횡단하고는 이내 부끄러워하는 인간적인 모습도 가감 없이 적었습니다. 길에서 만난 필리핀군 참전비를 보면서 가난한 우리를 돕기 위해 참전했던 필리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길에서 만난 인심은 꽤 호의적이더군요. “수고 많으시다” “대단한 일 하신다”는 격려도 많이 받았고요. 포도 노점상은 ‘한 송이’ 값을 묻자 그냥 드시라고 했고, 사과 장수도 ‘낱개로는 팔지 않는다“면서 사과 한 개를 덥석 집어 줬다지요. 광주광역시 인근의 노점에서는 홍시 한 개를 사려 하자 감 2개를 건네며 그냥 드시라고 했답니다. “혹시 교회 나가세요?” 물었더니 시크하게 “난, 법당에 나가요”라고 했다네요.
순례 이틀째 서울 새문안교회에 도착한 강정길 장로. 현재의 새 예배당이 지어지기 전의 모습이다. /강정길 장로 제공
역사적인 교회 방문도 빠뜨리지 않습니다. 순례 둘째 날은 언더우드가 세운 장로교 최초의 조직교회인 서울 새문안교회를 찾고, 인천에서는 아펜젤러가 세운 내리교회를 방문하며 개신교 초기 역사를 짚어보기도 했습니다. 인천 자유공원을 찾아 맥아더 장군 동상 앞에서 묵념하고 인천상륙작전을 떠올려 보기도 했습니다. 인천은 이기풍 목사가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제주를 향해 출발한 곳이기도 하지요.
당초 예정에 없던 가톨릭 한센인 시설 성 라자로 마을도 방문했습니다. 경기 의왕시의 1번 국도를 걷다가 우연히 성 라자로 마을 간판을 보고 잠시 망설였지만 “바쁜 일정을 핑계로 지나치고 만다면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고 했습니다. 정문 수위실에서 방문 목적을 말하자 사무실을 알려줬는데 그 친절한 노인의 손가락 마디가 없었다고 합니다. 한센병의 흔적이었지요. 아무 예고 없이 찾아온 방문객이었지만 성 라자로 마을 직원들은 친절하게 맞았다고 합니다. 소강당에서는 마을을 소개하는 15분짜리 영상을 강 장로 한 사람만을 위해 상영해 주었답니다. 강 장로는 작은 액수이지만 금일봉을 헌금함에 넣는 것으로 보답하고요. 마을 한 바퀴 돈 그는 “내가 지금껏 살면서 본 적이 없는 완벽한 정원 같았다”고 적었습니다.
일요일에는 길에서 만나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첫 번째 일요일인 10월 7일엔 천안의 성심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환난 때에도 담대하라’는 설교 제목이 마치 자신에게 맞춤으로 주신 말씀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순례 도중 군산성광교회를 방문한 강정길 장로. /강정길 장로 제공
길을 걸으며 떠오른 가족에 대한 사랑도 풀어놓았습니다. 아내와 만난 연애담도 털어놓았습니다. 길을 걷다 걸려온 아내의 건강을 당부하는 전화를 끊고는 “이럴 때 ‘여보 사랑해!’라고 한마디 덧붙이면 좋으련만 잘 나오지를 않는다. 아내도 마찬가지인 걸 보면 제주인의 천성인가 보다”라고 적었네요. 자녀와 손자, 손녀 이야기는 가슴 뭉클합니다. 모태 신앙으로 평생 신실한 신앙생활을 해온 그는 외손자, 외손녀가 장애를 갖게 되자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강 장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가정은 지금까지 별 탈 없이 무난한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에게 이런 아픔을 준 것은, 이 시련을 통해 우리 부부가 무엇인가를 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장애아 둘을 동시에 양육하기 힘든 딸을 위해 시각장애가 있는 외손녀는 강 장로 부부가 맡아 키울 결심을 합니다. 가족들에게 이 결심을 알린 그는 응접실 벽에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라는 욥기 구절을 직접 써 붙였다고 합니다. 딸과 외손녀를 향한 사랑이 감동적으로 느껴집니다.
벼이삭이 누렇게 익어가는 들녘을 보자 평소 가장 즐겨 부르는 찬송가가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옵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찬송가 79장이지요. 그런데 이어서 나오는 노래가 흥미롭습니다. 대중가요 ‘칠갑산’입니다. ‘칠갑산’에는 개인적 사연이 있답니다. 정년퇴직 후 평생교육원에서 오카리나를 배우면서 알게 된 노래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사가 좀처럼 외워지질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연습을 하고 있으면 곁에 있던 외손녀가 “땡!” 하면서 가사와 곡조를 정확히 잡아주었다고 합니다. 외손녀는 시각장애가 있지만 음감과 기억력이 뛰어났던 것이지요. 강 장로는 ‘칠갑산’을 흥얼거리며 외손녀를 떠올립니다.
길을 걸으며 마주치는 풍경을 보며 개신교계 현실을 고민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서울의 한 교회 앞에 ‘3330 운동-3000명 세례, 300교회 기관 지원, 30교회 설립’이라고 걸린 현수막을 보고는 “내 입이 쩍 벌어졌다. 제주에서는 꿈같은 이야기였다”고 하고, 전북 정읍에서는 “정읍은 인구가 10만명밖에 안 되는데도 교회가 많고, 인구 절반이 교인이라고 한다. 식당에 가면 고객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으며, 성경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을 붙인 간판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놀랍고 부러웠다. 인구의 절반이 기독교인이라니...”라며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순례의 목적인 이기풍 목사의 발자취는 광주, 전남 지역에서 주로 발견합니다. 이기풍 목사는 여수 우학리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1942년 6월 20일 별세했습니다.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일제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후유증으로 순교한 것이지요. 그의 유해는 당시 전남노회의 묘지에 모셨다가 토지 주인과의 마찰로 그가 시무했던 광주제일교회가 인수해 전남 화순의 교회 묘지에 안장했던 것입니다. 그는 묘비 앞에 서서 이런 기도를 올립니다. “사랑의 하나님! 주님이 뜻한 바 있어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인 이기풍 목사님을 제주에 선교사로 파견하여, 온갖 토속 신앙으로 가득 찬 제주섬에서 교회 350여 곳과 성도 5만명의 열매를 맺게 된 것은 오로지 목사님의 목숨을 건 헌신과 희생의 결과임을 믿습니다. 그의 영혼을 지켜 주시옵소서.”
전남 화순에 안장된 이기풍 목사의 묘지를 참배한 강정길 장로. /강정길 장로 제공
1920년 제4대 목사로 부임한 벌교대광교회에서는 이기풍 목사가 사용했던 큰 관인(官印)을 확인하고, 여수경찰서도 찾았습니다. 그런데 무작정 경찰서 민원실을 찾아가 “이곳이 이기풍 목사가 옥고를 치른 곳이라서 방문했다”고 말했는데도 수사과로 연결해 주었다고 합니다. 덕분에 강 장로는 지금은 건물을 헐고 신축해 자취를 찾을 수는 없지만 여수경찰서 유치장 내부까지 볼 수 있었다고 하지요. 성 라자로 마을에서도 그랬듯이 세상은 그의 의도를 선하게 받아들여준 것이지요.
목포에서 추자도로 가는 선상에 선 강정길 장로. /강정길 장로 제공
그리고 10월 24일. 이기풍 목사가 1개월간 머물렀던 추자도를 거쳐 제주도로 돌아옵니다. 강 장로는 집으로 가지 않고 교회 교육관에 숙소를 잡고 6일간 제주 일주 순례를 더 이어갑니다. 옛 일주도로를 따라 하루 30㎞씩 걷는 일정엔 제주성내교회 교인 7명이 함께했습니다. 제주도의 기독교 역사가 서린 곳을 모두 순례하고 마침내 10월 31일 제주성내교회로 돌아온 강 장로 일행은 도착 예배로서 순례를 마치게 됩니다. 강 장로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의 순례 일정은 끝이 났지만, 이기풍 목사님이 제주에 뿌려 놓은 복음의 씨앗은 계속해서 싹을 틔워, 제주 선교의 지평을 더욱 넓혀갈 것이다.”
제주성내교회 교인들과 함께 비양도 앞을 순례하는 모습. /강정길 장로 제공
순례한 지 18년, 책이 출간된 지도 8년이 지났지만 지금 읽어도 잔잔히 감동이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강연홍 제주성내교회 담임목사는 축하 글에서 “장로님의 이 800㎞의 ‘도상의 기도’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바로 주님과의 동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장로님은 그 순례길을 통해 이기풍 목사님이 품으셨던 꺼지지 않는 구령열(救靈熱)과 함께 고향과 가족들에 대한 상념의 열매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고 했습니다.
2007년 10월 한 달간의 도보 순례를 마치고 제주성내교회로 귀환한 모습. /강정길 장로 제공
‘코코’라는 애니메이션에선 망자(亡者)는 자신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질 때 두 번째 죽음을 맞고 완전히 소멸된다고 하지요. 아무 연고 없는 제주로 와서 생명의 위협까지 받으며 첫 교회를 설립했던 이기풍 목사님은 자신을 이렇게 기억해 주는 후손들이 있다는 사실에 하늘나라에서도 외롭지 않고 기뻐할 것 같습니다.
지난봄부터 ‘한국의 100년 교회를 가다’라는 제목의 기획 기사를 조선일보 지면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올해 개신교 한국 선교 140주년을 맞아 전국의 유서 깊은 교회의 스토리를 소개하는 기획입니다. 덕분에 전국을 다니면서 개신교 초기 역사에 대해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역사가 오래된 교회를 방문하면서 느끼는 점은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교회 역사에 자부심을 가진 교인들을 만나는 것은 큰 보람입니다. 교회의 담임목사는 바뀌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대를 이어 수십 년째 출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분들이 교회를 지키는 분들 대구 직장인밴드 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분들은 교회 역사 편찬을 맡아 전문가 못지않은 열정으로 자료를 섭렵하고 작은 부분까지 기록으로 남기기도 합니다. 팩트에 대해서 매우 엄격하고 사안의 판단에 대해서도 한쪽 면을 부각하기보다는 다양한 측면에서 역사를 다뤄 모든 교인이 수긍하고 인정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주성내교회 강정길 원로 장로님도 그 정신과무료상담 런 분이었습니다.
제주성내교회 강정길 장로의 순례기 '갈 길을 밝혀 주시니' 표지. 강 장로는 2007년 10월 한 달 동안 이기풍 목사의 발자취를 찾아 임진각에서 제주까지 800km를 도보 순례했다.
제주성내교회 강남 집값 취재를 마치고 떠나올 때 강 장로님은 책 한 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갈 길을 밝혀주시니’(쿰란출판사)라는 제목의 여행기였습니다. 표지엔 본인이 배낭을 메고 걷는 모습이 실렸고요. 이 책은 그가 2007년 10월 1일부터 한 달간 임진각에서 제주까지 800㎞를 혼자 도보 순례한 기록이었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제주 선교 100주년을 기념한 순례였습니다. 책 제1금융권무직자대출 은 순례 10년 후인 2017년에 나왔습니다.
한국 장로교 역사상 처음으로 제주도 선교에 나섰던 이기풍 목사.
이기풍 목사는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7명 중 한 명입니다. 이 중소기업기술정보진흥원장 사퇴 기풍 목사는 조선독로회에서 제주 선교사로 파송돼 1908년 제주성내교회를 설립했습니다. 당시 제주도에는 토속 신앙이 성행했고, 선교사에 대한 반감도 심했다고 합니다. 이기풍 목사는 “설러블라 설러블라 경허지 않으면 야가기 끄너 블켜” 즉 “그만두라 그렇지 않으면 목을 베어 놓겠다”는 협박까지 받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전도했다고 하지요.
강 장로의 순례는 평양에서 출발해 제주에 이르는 이기풍 목사의 발자취를 따라 걷겠다는 각오였습니다. 이기풍 목사는 평양에서 서울까지는 기차로 와서 인천항에서 군산을 경유해 목포까지는 범선을 이용했으며, 목포에서 추자도, 추자도에서 제주도 코스도 배로 이동했습니다. 강 장로는 배가 아니라 도보로 이기풍 목사가 제주로 향한 길과 가장 가까운 코스를 택했습니다. 주로 1번 국도를 걸었습니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책장을 넘길수록 서서히 빠져들었습니다. 한때 국내에서도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가 크게 유행했습니다. 여행기도 많이 나왔지요. 또 제주 올레길도 많은 분이 걸었지요. 그런 책들에는 감동적이고 극적인 스토리도 많았습니다.
제주 성내교회/ 김한수 기자
그런 여행기와 비교한다면 강 장로의 책은 극적인 스토리는 없습니다. 순례 과정에서 뭔가 대단한 경험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매일매일 성실하게 한 걸음씩 옮기는 그의 모습을 읽으면서 평범하지만 신실한 한 신앙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국 개신교 140년은 이렇게 차곡차곡 쌓여온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순례 당시 60대 중반이었던 강 장로는 해병대 장교로 전역한 후 평생 고향 제주에서 교편을 잡은 분이었습니다. 제주여고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제주상업고등학교(현 제주중앙고)에서 교장을 지냈습니다. 등단한 수필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순례기에는 쉬운 문장으로 이기풍 목사로 대표되는 초기 개신교의 역사뿐 아니라 그의 삶과 신앙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어떻게 800㎞ 도보 순례를 마음먹게 됐을까요. 그는 ‘차마고도(車馬古道)’라는 TV 프로그램에서 티베트인 세 사람이 라사까지 2100㎞를 6개월에 걸쳐 다섯 걸음 걷고 땅바닥에 몸을 던지는 것을 보면서(엎드렸다가 일어서는 것도 아니고) ‘서서 걸으면서 1개월에 800㎞를 가는 나의 도보 순례는 망설일 이유가 없다’고 다짐했답니다. 그렇게 18년 전 이맘때인 2007년 10월 1일, 순례가 시작됐습니다.
등산복에 등산화, 모자와 배낭, 지팡이 등 걷기 좋은 차림에 배낭에는 좋아하는 찬송가 복사본 10매와 ‘선교 명함’ 200매, 주먹만 한 작은 성경 등으로 8kg 정도의 짐을 꾸렸습니다. 배낭에는 ‘이기풍 목사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 도보 순례-평양(임진각)에서 제주까지’라고 쓴 깃발을 꽂았습니다.
강정길 장로가 본격 순례에 앞서 출발점인 임진각에서 기념촬영했다. /강정길 장로 제공
숙박은 모텔, 식사는 식당에서 해결하기로 정했답니다. 일정은 아침 식사 7시, 성경 낭독(출발 전 매일 한 장), 출발 기도(배낭 메고 방문 안에서), 출발 8시로 정했습니다. 특별히 예정된 일정은 없었습니다. 가는 길에 교회가 보이면 들어가서 “도보 순례 중”이라고 인사하고 선교 명함을 건네고 다시 길을 나서는 식이었습니다. 책은 하루하루 순례의 전 과정을 적은 일기 같은 형식입니다. 중간중간에 올렸던 기도와 찬송, 묵상이 풍경화처럼 펼쳐집니다.
횡단보도가 없는 길에서는 “하나님! 이런 때는 한 번만 눈감아 주십시오” 하면서 무단 횡단하고는 이내 부끄러워하는 인간적인 모습도 가감 없이 적었습니다. 길에서 만난 필리핀군 참전비를 보면서 가난한 우리를 돕기 위해 참전했던 필리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길에서 만난 인심은 꽤 호의적이더군요. “수고 많으시다” “대단한 일 하신다”는 격려도 많이 받았고요. 포도 노점상은 ‘한 송이’ 값을 묻자 그냥 드시라고 했고, 사과 장수도 ‘낱개로는 팔지 않는다“면서 사과 한 개를 덥석 집어 줬다지요. 광주광역시 인근의 노점에서는 홍시 한 개를 사려 하자 감 2개를 건네며 그냥 드시라고 했답니다. “혹시 교회 나가세요?” 물었더니 시크하게 “난, 법당에 나가요”라고 했다네요.
순례 이틀째 서울 새문안교회에 도착한 강정길 장로. 현재의 새 예배당이 지어지기 전의 모습이다. /강정길 장로 제공
역사적인 교회 방문도 빠뜨리지 않습니다. 순례 둘째 날은 언더우드가 세운 장로교 최초의 조직교회인 서울 새문안교회를 찾고, 인천에서는 아펜젤러가 세운 내리교회를 방문하며 개신교 초기 역사를 짚어보기도 했습니다. 인천 자유공원을 찾아 맥아더 장군 동상 앞에서 묵념하고 인천상륙작전을 떠올려 보기도 했습니다. 인천은 이기풍 목사가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제주를 향해 출발한 곳이기도 하지요.
당초 예정에 없던 가톨릭 한센인 시설 성 라자로 마을도 방문했습니다. 경기 의왕시의 1번 국도를 걷다가 우연히 성 라자로 마을 간판을 보고 잠시 망설였지만 “바쁜 일정을 핑계로 지나치고 만다면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고 했습니다. 정문 수위실에서 방문 목적을 말하자 사무실을 알려줬는데 그 친절한 노인의 손가락 마디가 없었다고 합니다. 한센병의 흔적이었지요. 아무 예고 없이 찾아온 방문객이었지만 성 라자로 마을 직원들은 친절하게 맞았다고 합니다. 소강당에서는 마을을 소개하는 15분짜리 영상을 강 장로 한 사람만을 위해 상영해 주었답니다. 강 장로는 작은 액수이지만 금일봉을 헌금함에 넣는 것으로 보답하고요. 마을 한 바퀴 돈 그는 “내가 지금껏 살면서 본 적이 없는 완벽한 정원 같았다”고 적었습니다.
일요일에는 길에서 만나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첫 번째 일요일인 10월 7일엔 천안의 성심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환난 때에도 담대하라’는 설교 제목이 마치 자신에게 맞춤으로 주신 말씀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순례 도중 군산성광교회를 방문한 강정길 장로. /강정길 장로 제공
길을 걸으며 떠오른 가족에 대한 사랑도 풀어놓았습니다. 아내와 만난 연애담도 털어놓았습니다. 길을 걷다 걸려온 아내의 건강을 당부하는 전화를 끊고는 “이럴 때 ‘여보 사랑해!’라고 한마디 덧붙이면 좋으련만 잘 나오지를 않는다. 아내도 마찬가지인 걸 보면 제주인의 천성인가 보다”라고 적었네요. 자녀와 손자, 손녀 이야기는 가슴 뭉클합니다. 모태 신앙으로 평생 신실한 신앙생활을 해온 그는 외손자, 외손녀가 장애를 갖게 되자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강 장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가정은 지금까지 별 탈 없이 무난한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에게 이런 아픔을 준 것은, 이 시련을 통해 우리 부부가 무엇인가를 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장애아 둘을 동시에 양육하기 힘든 딸을 위해 시각장애가 있는 외손녀는 강 장로 부부가 맡아 키울 결심을 합니다. 가족들에게 이 결심을 알린 그는 응접실 벽에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라는 욥기 구절을 직접 써 붙였다고 합니다. 딸과 외손녀를 향한 사랑이 감동적으로 느껴집니다.
벼이삭이 누렇게 익어가는 들녘을 보자 평소 가장 즐겨 부르는 찬송가가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옵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찬송가 79장이지요. 그런데 이어서 나오는 노래가 흥미롭습니다. 대중가요 ‘칠갑산’입니다. ‘칠갑산’에는 개인적 사연이 있답니다. 정년퇴직 후 평생교육원에서 오카리나를 배우면서 알게 된 노래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사가 좀처럼 외워지질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연습을 하고 있으면 곁에 있던 외손녀가 “땡!” 하면서 가사와 곡조를 정확히 잡아주었다고 합니다. 외손녀는 시각장애가 있지만 음감과 기억력이 뛰어났던 것이지요. 강 장로는 ‘칠갑산’을 흥얼거리며 외손녀를 떠올립니다.
길을 걸으며 마주치는 풍경을 보며 개신교계 현실을 고민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서울의 한 교회 앞에 ‘3330 운동-3000명 세례, 300교회 기관 지원, 30교회 설립’이라고 걸린 현수막을 보고는 “내 입이 쩍 벌어졌다. 제주에서는 꿈같은 이야기였다”고 하고, 전북 정읍에서는 “정읍은 인구가 10만명밖에 안 되는데도 교회가 많고, 인구 절반이 교인이라고 한다. 식당에 가면 고객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으며, 성경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을 붙인 간판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놀랍고 부러웠다. 인구의 절반이 기독교인이라니...”라며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순례의 목적인 이기풍 목사의 발자취는 광주, 전남 지역에서 주로 발견합니다. 이기풍 목사는 여수 우학리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1942년 6월 20일 별세했습니다.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일제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후유증으로 순교한 것이지요. 그의 유해는 당시 전남노회의 묘지에 모셨다가 토지 주인과의 마찰로 그가 시무했던 광주제일교회가 인수해 전남 화순의 교회 묘지에 안장했던 것입니다. 그는 묘비 앞에 서서 이런 기도를 올립니다. “사랑의 하나님! 주님이 뜻한 바 있어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인 이기풍 목사님을 제주에 선교사로 파견하여, 온갖 토속 신앙으로 가득 찬 제주섬에서 교회 350여 곳과 성도 5만명의 열매를 맺게 된 것은 오로지 목사님의 목숨을 건 헌신과 희생의 결과임을 믿습니다. 그의 영혼을 지켜 주시옵소서.”
전남 화순에 안장된 이기풍 목사의 묘지를 참배한 강정길 장로. /강정길 장로 제공
1920년 제4대 목사로 부임한 벌교대광교회에서는 이기풍 목사가 사용했던 큰 관인(官印)을 확인하고, 여수경찰서도 찾았습니다. 그런데 무작정 경찰서 민원실을 찾아가 “이곳이 이기풍 목사가 옥고를 치른 곳이라서 방문했다”고 말했는데도 수사과로 연결해 주었다고 합니다. 덕분에 강 장로는 지금은 건물을 헐고 신축해 자취를 찾을 수는 없지만 여수경찰서 유치장 내부까지 볼 수 있었다고 하지요. 성 라자로 마을에서도 그랬듯이 세상은 그의 의도를 선하게 받아들여준 것이지요.
목포에서 추자도로 가는 선상에 선 강정길 장로. /강정길 장로 제공
그리고 10월 24일. 이기풍 목사가 1개월간 머물렀던 추자도를 거쳐 제주도로 돌아옵니다. 강 장로는 집으로 가지 않고 교회 교육관에 숙소를 잡고 6일간 제주 일주 순례를 더 이어갑니다. 옛 일주도로를 따라 하루 30㎞씩 걷는 일정엔 제주성내교회 교인 7명이 함께했습니다. 제주도의 기독교 역사가 서린 곳을 모두 순례하고 마침내 10월 31일 제주성내교회로 돌아온 강 장로 일행은 도착 예배로서 순례를 마치게 됩니다. 강 장로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의 순례 일정은 끝이 났지만, 이기풍 목사님이 제주에 뿌려 놓은 복음의 씨앗은 계속해서 싹을 틔워, 제주 선교의 지평을 더욱 넓혀갈 것이다.”
제주성내교회 교인들과 함께 비양도 앞을 순례하는 모습. /강정길 장로 제공
순례한 지 18년, 책이 출간된 지도 8년이 지났지만 지금 읽어도 잔잔히 감동이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강연홍 제주성내교회 담임목사는 축하 글에서 “장로님의 이 800㎞의 ‘도상의 기도’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바로 주님과의 동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장로님은 그 순례길을 통해 이기풍 목사님이 품으셨던 꺼지지 않는 구령열(救靈熱)과 함께 고향과 가족들에 대한 상념의 열매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고 했습니다.
2007년 10월 한 달간의 도보 순례를 마치고 제주성내교회로 귀환한 모습. /강정길 장로 제공
‘코코’라는 애니메이션에선 망자(亡者)는 자신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질 때 두 번째 죽음을 맞고 완전히 소멸된다고 하지요. 아무 연고 없는 제주로 와서 생명의 위협까지 받으며 첫 교회를 설립했던 이기풍 목사님은 자신을 이렇게 기억해 주는 후손들이 있다는 사실에 하늘나라에서도 외롭지 않고 기뻐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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