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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반성규수 작성일26-02-08 18:43 조회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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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드레스를 입은 마리 크뢰이어, 1880년경 [소푸스 크리스텐센]
편집자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종종 문학과 역사 이야기도 합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고작 3년새, 빛을 잃어가는 그녀
릴게임몰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 마리와 인테리어, 1889, 캔버스에 유채, 35x25cm, 히르슈프룽 컬렉션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스물두 살의 마리는 반짝이는 여인이었다.
마리는 큰 눈과 갸름한 얼굴을 가졌다. 활짝 웃으면 볼부터 붉 릴게임모바일 어졌다. 그 틈으로 가지런한 앞니도 보였다. 쇄골은 선명했고, 뻗어나가는 팔다리는 가늘었다. 인상만큼 행동도 단아했다. 목소리는 작았으나 발음은 또렷했다. 말이 적고 움직임도 크지 않았지만, 그 조심스러움 덕에 외려 더 주목받았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늘 인기가 많았다. 사교장에서는 언제나 호의가 따랐다. 이는 문학적 과장이라고 할 수 없었다. 당시 마리의 쿨사이다릴게임 친구들이 그녀에게 “덴마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1889년, 그 시절 마리는 그림<마리와 인테리어>에서 마주할 수 있다. 화폭 속 마리는 손거울 앞에서 앞머리를 손질한다. 피부에는 살굿빛, 입술에는 제철 과일처럼 진한 붉은색이 묻었다. 골반까지 내려오는 흰 카디건, 발목 밑으로 떨어질 분홍빛 원피스는 그 자체로 풍성한 체리마스터pc용다운로드 꽃다발 같다. 도자기는 촛불의 빛을 품었다. 커튼은 요동치는 두어 개의 색을 안고 있다. 두 사물도 그녀의 산들거리는 생기에 젖어있는 듯하다.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 해안가, 예술가의 아내와 개(스카겐에서의 여름 저녁), 1892, 캔버스에 유채, 123x206cm, 스카겐 오징어릴게임 박물관
그리고… 3년 후. 스물다섯 살의 마리는 반짝이던 그 빛을 잃어가는 여인이었다.
눈은 여전히 크고 깊었다. 하지만, 이제 그곳에는 우수의 감정이 매달려 있었다. 웃느라 앞니를 보이는 일보다는, 사색에 잠겨 입술을 오므리는 순간이 많았다. 목소리는 작아지다 못해 흐릿해지고 있었다. 언젠가부터는 한숨으로 모든 행동을 갈음하는 버릇도 생기고 말았다. 1892년 그림, <해안가, 예술가의 아내와 개(스카겐에서의 여름 저녁)>. 당시 마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마리는 반려견 랩과 함께 스카겐 해변에 서 있다. 눈은 여릿하다. 코끝과 귓바퀴는 빨갛다. 그녀는 연노란색 원피스를 입었다. 곧은 허리를 감싸는 천, 모래알을 간질이는 밑단에서 느껴지는 건 오직 고요와 침잠(沈潛). 한때 방안을 채우던 생기는 없다. 푸르름만 나지막이 일렁인다. 그림 속 시간은 프랑스어로 이른바 ‘파란 시간(l’heure bleue)’. 저물녘의 찰나, 땅과 맞닿아 내리쬐는 빛이 물에 튕겨 세상을 음울하게 물들이는 순간이다. 마리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녀는 3년 새 무슨 일을 겪었을까.
그와의 용기를 낸 로맨스
베르타 베그만, 보트에 앉아있는 마리, 1885, 캔버스에 유채, 127x107cm, 뢰브 덴마크 미술 컬렉션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이 있었나요?”
시간을 되돌려 1888년, 12월. 그러니까, 마리가 곧 스물두 살이 되는 다시 그 시점. 한 남자가 마리의 인사를 받고 물었다. 그의 이름은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 나이 서른일곱의 화가였다. “페더 선생님. 저를 기억하지 못하세요?” 마리가 답했다. 그녀는 웃었다. 미소 틈으로 흰 치아가 또 보였다.
이곳은 프랑스 파리. 장소는 카페 드 라 레장스(Cafe De La Regence).
페더가 바로 떠올리지 못했을 뿐, 그와 마리 사이에는 충분한 인연이 있었다. 사실, 마리는 그저 사교계의 예쁘장한 여인 정도로 볼 수 없었다. 그녀에게도 직업이 있었다. 그것은 페더와 같은 화가였다. 마리는 아름다움만큼의 예술 재능도 갖고 있었다. 칼 톰센과 베르타 베그만 등 당대 유명 화가를 스승으로 둘 만큼 그림에 대한 자세 또한 진지했다. 마리는 한때 이른바 ‘젊은 여성 예술가의 모임’에서도 활동했다. 이 공동체는 틈틈이 강사를 불러 특강을 했다. 페더도 그 제안을 받고 이들 앞에 선 적이 있었다. 심지어 마리는 그런 페더의 그림 모델로 나서준 적도 있었다. “…아, 마리 씨였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페더가 끝내 떠올려준 덕에, 마리는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마리도 나름대로 큰 용기를 낸 일이었다. 그 조심스러운 성격에도 먼저 인사를 건넨 것은 페더, 이 사람에 대한 호감 때문이었다. 금빛 머리칼에 턱수염을 기른 이 남자는 말과 행동이 단정했다. 평소에는 낙천적이지만, 붓과 팔레트만 쥐면 무서울 만큼 날카로워지는 면도 있었다. 그런 차이 또한 매력이었다. “차를 주문해 드릴까요?” 이번에는 페더가 먼저 물었다. 마리는 말없이 그를 봤다. “음, 좋아요.” 일부러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볼은 또 눈치 없이 붉어졌다.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마리 크뢰이어, 마리와 페더의 이중 초상화, 1890, 15x18.7cm, 스카겐 박물관
둘은 통하는 게 많았다.
두 사람 모두 여름의 바다를 좋아했다. 겨울의 부서지는 햇살도 사랑했다. 마리는 덴마크, 페더는 노르웨이 출신이었다. 다만 페더도 덴마크에서 보낸 시간이 긴 만큼 추억은 풍성했다. 서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고, 몇 번 식사를 더 하고, 몇 잔의 술잔을 건넬 무렵. 두 사람이 결혼을 말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래요. 좋아요.” 마리가 말했다. 수줍게 미소도 지었다. 이번에도 목소리는 작았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떨림이 있었다. 1889년, 7월. 마리와 페더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다. 마리 트리에프케에서 마리 크뢰이어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들 둘이 발 맞추는 정원에선 꽃가루가 흩날렸다. 빨강, 분홍, 그리고 파랑. 형형색색으로.
능력 있는 남편은… ‘높은 벽’처럼 보였다
마리 크뢰이어, 이탈리아 소녀의 초상, 1890년경, 패널에 유채, 19x11.5cm
소녀는 동그랗다.
눈도 동그랗고, 얼굴도 동그랗고, 두건과 원피스도 하나 같이 동글동글하다. 호기심에 찬 입가는 금방이라도 수십 가지 질문을 쏟아낼 듯하다. “언니는 화가예요?”, “저분이 남편이죠?”, “프러포즈는 누가 했어요?”와 같은. 마리는 허니문 기간 중 <이탈리아 소녀의 초상>을 그렸다. 아이의 맑은 순수함을 포착한 작품이었다. 마리와 페더는 여행을 길게 다녔다. 시작은 덴마크의 어촌마을 스텐비에르그였다. 이어 이탈리아 아말피와 라벨로 등을 함께 둘러봤다. 마리는 도중에 장티푸스를 앓기도 했다. 몸은 조금 약해졌지만, 다행히 병 기운은 털어낼 수 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이제 능력 있는 남편이 있고, 가정의 안정이 있고, 여전히 빛나는 젊음이 있었다. 하지만, 들뜬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리는 몰랐다.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입체적으로 작동하는 곳이라는 점을.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 힙, 힙, 후라(만세)!, 1887~1888, 캔버스에 유채, 134.5x165.5cm, 예테보리 미술관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 라벨로의 여인숙(레스토랑), 1890, 캔버스에 유채, 48.3x60.3cm, 히르슈프룽 컬렉션
마리는 결혼 후에도 계속 붓을 쥐고 싶었다.
그래서 1891년, 한 전시회에 남편 페더와 나란히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과연 페더는 페더였다. 그의 그림은 찬란했다. 직전 여행과 체류 경험이 그의 세계관을 그새 더 넓힌 듯했다. 페더는 어느덧 <힙, 힙, 후라(만세)!>와 <라벨로의 여인숙(레스토랑)>을 그릴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빛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었다. 인물의 표정과 동작을 정확히 묘사하는 일을 넘어, 이들 각자가 품은 사연까지 오롯이 녹여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페더는 이미 10대 시절부터 덴마크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금메달을 받은 수재였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단 화가 레옹 보나의 제자였으며, 에두아르 마네와 클로드 모네 등 동시대 가장 파격적인 예술가들과 직간접적 인연도 있었다.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 작업하는 마리, 1890, 패널에 유채, 24.6x34.8cm, 스카겐 박물관
“마리 씨. 아니, 이제 크뢰이어 부인이죠. 부인 그림도 감상 잘했습니다.”
…내 그림도? 마리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속이 쓰렸다. 마리도 기술은 좋았다. 그 시절 흔치 않은 여성 화가로 산다는 것. ‘살아남아’ 활동을 이어간다는 자체가 실력과 가능성의 증표였다. 그녀는 ‘아름다움이 곧 진리이자, 진리가 곧 아름다움(Beauty is truth, truth beauty·시인 존 키츠)’이라는 말을 믿고 따른, 자기 감각에 자부심이 큰 예술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리는 페더 앞에서 차츰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페더는 남편이자 든든한 동료 화가인 한편, 그녀의 의욕을 꺾게 하는 단단한 벽이 되고 있었다.
나는 때때로 내 모든 노력이 헛된 것이라고 생각해.
극복해야 할 게 너무 많아.
(…)
내가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결코, 결코 진정으로 위대한 성취를 이루지는 못할 거야.
그녀는 언젠가부터 이처럼 자조하는 순간이 잦아졌다. 마리는 섬세했다. 그렇기에 본인에게 유독 가혹한 면도 있었다. 부부는 보통 여름에는 스카겐, 겨울에는 코펜하겐 등을 오가며 살았다. 스카겐은 세 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고요한 물결과 모래알이 끝없이 깔린 땅이었다. 그곳은 진작부터 예술가 공동체가 꾸려질 만큼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있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마리가 스카겐에 있는 동안 그린 것으로 확실히 볼 수 있는 그림은 한 점뿐이라고 한다. 당시 그녀의 심란함이 얼마나 크고 깊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만, 마리가 붓을 놓게 된 정확한 이유에 대해선 명확히 밝혀진 게 없다.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 마리 크뢰이어, 1891, 캔버스에 유채, 32x34cm, 스카겐 박물관
페더는 그런 마리에게 위로를 주지 못했다.
페더는 바빴다. 도시를 오가며 계속 그림을 그렸다. 아내를 다독일 여유가 많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페더는 마리를 자기 모델로 삼을 때도 많았다. 동일 선상에 있는 화가가 아닌 모델. 붓을 든 주체가 아닌, 화가의 손짓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객체. 페더는 마리가 모델로서 아름답기에 그렸을 것이다. 구도와 포즈 등 작업 이해도도 높았기에 더욱 자주 찾았을 터였다. 결과적으로는, 이 또한 마리의 복잡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행보였다. 마리는 1895년에 딸 비베케를 안았다. 언젠가부터 마리가 하는 건 육아와 집안일 뿐이었다. 집을 꾸미고 가구를 디자인하는 등 나름의 ‘예술적’ 시도도 해봤지만, 완전한 돌파구가 될 수는 없었다. 푸르른 바다 앞 마리의 우울함은 깊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울 때가 아니었다. 곧 들이닥치는 다른 일로 인해, 그녀는 눈물을 펑펑 쏟아야 했기에.
더는 통하지 않는 마음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 스카겐 해변의 여름 저녁(화가와 그의 아내), 1899, 캔버스에 유채, 135x187cm, 히르슈프룽 컬렉션
마리와 페더가 스카겐의 해변을 걷고 있다.
달이 물결을 민다. 그사이 바람도 배를 밀어낸다. 마리는 한층 더 축축해진 달빛 앞에서 묘한 표정을 짓는다. 흰옷은 이제 빛을 품지 않는다. 그녀의 초점은 더 옅어졌고, 인상과 모습 또한 서글퍼졌다. 페더는 그런 마리의 팔에 손가락을 건다. 다시 발을 맞춰보려는 듯 방향도 틀어본다. 둘은 여름의 반짝이는 바다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지금 두 사람의 마음은 통하지 않는다. 반려견 랩만이 눈치 없이 부츠를 핥을 뿐이다. 페더의 1899년 작품,<스카겐 해변의 여름 저녁(화가와 그의 아내)>이다.
당시 페더의 몇몇 동료는 이 화폭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익어가는 달빛, 이는 그 시절 상징주의자들 사이에서 ‘죽음의 도래’ 정도로 해석되곤 했기에. 그런데 그림을 그리고 몇 달 후, 페더는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잊은 과거, 잃어버린 직업
마리 크뢰이어, 직조기 앞에서, 1890, 패널에 유채, 47.4x58cm, 스카겐 박물관
마리 크뢰이어, 바느질하는 여인이 있는 실내, 연도미상, 캔버스에 유채, 46x38.2cm, 스카겐 박물관
1900년의 어느 날.
페더는 덴마크의 또 다른 해안 도시, 미델파르트의 정신병원에서 첫 입원 생활을 했다. 페더에게 찾아온 병의 이름은 조울증이었다. 정확히 무엇 때문에 이 병에 걸렸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페더의 어머니 또한 만성적인 조울증을 앓았기에, 학계에선 유전의 가능성도 제시하곤 한다. 드러난 병은 더는 숨지 않았다. 끝까지 목을 꼿꼿하게 세웠다. 페더는 이번 병원 생활 이후로도 생을 다할 때까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야 했다.
물론 페더 본인이 가장 힘들었겠지만, 그런 남편의 파고를 감당해야 하는 마리 또한 매일이 쉽지 않았다. 페더의 기복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페더는 여전히 많은 순간 쾌활했다. 작업에도 열정적으로 임했다. 아내와 자식에게 마음도 쏟았다. 여행도 잘 다녔고, 친구들과 편지 또한 꾸준히 주고받았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마리를 더 눈물짓게 했다. 마리도 최선을 다했다. 그녀는 집안을 살피고, 아이를 돌보고, 종종 웅크린 채 밑바닥을 긁고 있는 페더를 다독였다. 언젠가 인구조사 공무원이 집에 찾아왔을 때, 마리는 직업을 묻는 말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제 직업은요….” 주부? 모델? 간병인? 마지막까지도 떠오르지 않던 단어는 화가였다. 그것은, 참으로 씁쓸한 일이었다.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 스카겐 해변에서 열리는 하지 전야 모닥불(화폭 가운데 모자를 쓴 채 배에 기대있는 남녀가 휴고 알프벤과 마리 크뢰이어), 1906, 캔버스에 유채, 257x149.5cm, 스카겐 박물관
어떤 사랑은 절망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1902년, 페더가 일이 있어 파리를 찾은 그해. 마리는 홀로 시칠리아섬의 타오르미나로 여행을 떠났다.
거기서 거짓말처럼 한 남자를 만났다.
이름은 휴고 알프벤. 마리보다 다섯 살 어린 음악가였다. 페더와는 또 다른 느낌의 단정함이 있는 예술가였다. 휴고가 마리의 손을 무심코 잡았을 때, 그녀의 볼은 다시 붉어지고 말았다. 이는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소용돌이에 휩쓸리기를 택했다. 심해의 끄트머리에서 건져올릴 수 있는 건, 불륜녀라는 낙인밖에 없다는 걸 알고서도. 마리와 페더는 1905년에 이혼했다. 페더는 이미 마리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원래는 붙잡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마리가 다른 남자와의 관계에서 아이를 가졌다는 점을 안 순간, 이혼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마리는 곧 딸 마르기타를 출산했다. 아이의 성은 역시나 크뢰이어가 아닌, 알프벤이었다. 둘은 갈라섰다. 두 사람의 인연, 그것은 바다 위 달빛처럼 반짝이다가, 일렁이다가, 끝내 부서지는 결말이었다.
삶이라는 예술
마리 크뢰이어와 딸. 손을 잡은 모습.
페더는 1909년에 죽었다.
마리와의 이혼 후 4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죽은 곳은 스카겐, 나이는 쉰여덟 살이었다. 그쯤 페더는 몸과 마음 모두 온전하지 못했다. 그의 감정은 마리가 사라진 후부터 더욱 크게 요동쳤다. 이 와중에 심각한 시력 저하도 겪어야 했다. 죽기 직전에는 사실상 눈이 먼 상태였다는 말도 있다. 마리는? 1912년에 새롭게 결혼식을 올렸다. 상대는 역시나 휴고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끝도 좋지만은 않았다. 마리는 휴고에게 바람기가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예물을 주고받은 건, 딸 마르기타의 삶 때문이었다. 불길한 예감은 들어맞았다. 마리는 결국 휴고와도 이혼한다. 염려했던 그 문제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둘은 마리의 그림 소유권을 놓고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 마리의 말년에 대해선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가 스톡홀름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는 말 정도만 소문처럼 떠돌 뿐이다. 마리는 1940년에 눈을 감았다. 사인은 암이었다.
마리 크뢰이어와 딸, 소파에 앉아있는 모습
페더에게 인사를 한 날, 그에게 벽을 느껴 붓을 멀리한 순간, 난장판이 돼가는 집을 다독이고, 이를 버티다 못해 다른 남자와의 사랑을 꿈꾼 시절.
마리의 삶은 늘 극적인 고민과 선택의 연속이었다. 오랜 시간 마리는 한 위대한 화가의 아내이자 모델로 기록에 쓰였다. 하지만, 그렇게만 보기에는 무척 입체적인 인생이다. “적어도, 나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 고뇌했어요.” 마리는 이 말을 하고 싶지 않을까. 이런 삶도 있었다. 이런 삶도 예술이 될 수 있고, 예술로 다뤄질 수 있는 법이다.
참고자료
스카겐 박물관
Halkier, Katrine, Krøyer: An International Perspective, Hirschsprung Collection
Hornung, Peter Michael, Peder Severin Krøyer, Fogtdal
Olsen, Claus & National Gallery of Ireland, Krøyer and the artists‘ colony at Skagen, National Gallery of Ireland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 장미, 마리가 정원 접이식 의자에 앉아있는 풍경, 1893, 캔버스에 유채, 76.5x67.5cm, 스카겐 박물관
편집자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종종 문학과 역사 이야기도 합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고작 3년새, 빛을 잃어가는 그녀
릴게임몰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 마리와 인테리어, 1889, 캔버스에 유채, 35x25cm, 히르슈프룽 컬렉션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스물두 살의 마리는 반짝이는 여인이었다.
마리는 큰 눈과 갸름한 얼굴을 가졌다. 활짝 웃으면 볼부터 붉 릴게임모바일 어졌다. 그 틈으로 가지런한 앞니도 보였다. 쇄골은 선명했고, 뻗어나가는 팔다리는 가늘었다. 인상만큼 행동도 단아했다. 목소리는 작았으나 발음은 또렷했다. 말이 적고 움직임도 크지 않았지만, 그 조심스러움 덕에 외려 더 주목받았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늘 인기가 많았다. 사교장에서는 언제나 호의가 따랐다. 이는 문학적 과장이라고 할 수 없었다. 당시 마리의 쿨사이다릴게임 친구들이 그녀에게 “덴마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1889년, 그 시절 마리는 그림<마리와 인테리어>에서 마주할 수 있다. 화폭 속 마리는 손거울 앞에서 앞머리를 손질한다. 피부에는 살굿빛, 입술에는 제철 과일처럼 진한 붉은색이 묻었다. 골반까지 내려오는 흰 카디건, 발목 밑으로 떨어질 분홍빛 원피스는 그 자체로 풍성한 체리마스터pc용다운로드 꽃다발 같다. 도자기는 촛불의 빛을 품었다. 커튼은 요동치는 두어 개의 색을 안고 있다. 두 사물도 그녀의 산들거리는 생기에 젖어있는 듯하다.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 해안가, 예술가의 아내와 개(스카겐에서의 여름 저녁), 1892, 캔버스에 유채, 123x206cm, 스카겐 오징어릴게임 박물관
그리고… 3년 후. 스물다섯 살의 마리는 반짝이던 그 빛을 잃어가는 여인이었다.
눈은 여전히 크고 깊었다. 하지만, 이제 그곳에는 우수의 감정이 매달려 있었다. 웃느라 앞니를 보이는 일보다는, 사색에 잠겨 입술을 오므리는 순간이 많았다. 목소리는 작아지다 못해 흐릿해지고 있었다. 언젠가부터는 한숨으로 모든 행동을 갈음하는 버릇도 생기고 말았다. 1892년 그림, <해안가, 예술가의 아내와 개(스카겐에서의 여름 저녁)>. 당시 마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마리는 반려견 랩과 함께 스카겐 해변에 서 있다. 눈은 여릿하다. 코끝과 귓바퀴는 빨갛다. 그녀는 연노란색 원피스를 입었다. 곧은 허리를 감싸는 천, 모래알을 간질이는 밑단에서 느껴지는 건 오직 고요와 침잠(沈潛). 한때 방안을 채우던 생기는 없다. 푸르름만 나지막이 일렁인다. 그림 속 시간은 프랑스어로 이른바 ‘파란 시간(l’heure bleue)’. 저물녘의 찰나, 땅과 맞닿아 내리쬐는 빛이 물에 튕겨 세상을 음울하게 물들이는 순간이다. 마리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녀는 3년 새 무슨 일을 겪었을까.
그와의 용기를 낸 로맨스
베르타 베그만, 보트에 앉아있는 마리, 1885, 캔버스에 유채, 127x107cm, 뢰브 덴마크 미술 컬렉션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이 있었나요?”
시간을 되돌려 1888년, 12월. 그러니까, 마리가 곧 스물두 살이 되는 다시 그 시점. 한 남자가 마리의 인사를 받고 물었다. 그의 이름은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 나이 서른일곱의 화가였다. “페더 선생님. 저를 기억하지 못하세요?” 마리가 답했다. 그녀는 웃었다. 미소 틈으로 흰 치아가 또 보였다.
이곳은 프랑스 파리. 장소는 카페 드 라 레장스(Cafe De La Regence).
페더가 바로 떠올리지 못했을 뿐, 그와 마리 사이에는 충분한 인연이 있었다. 사실, 마리는 그저 사교계의 예쁘장한 여인 정도로 볼 수 없었다. 그녀에게도 직업이 있었다. 그것은 페더와 같은 화가였다. 마리는 아름다움만큼의 예술 재능도 갖고 있었다. 칼 톰센과 베르타 베그만 등 당대 유명 화가를 스승으로 둘 만큼 그림에 대한 자세 또한 진지했다. 마리는 한때 이른바 ‘젊은 여성 예술가의 모임’에서도 활동했다. 이 공동체는 틈틈이 강사를 불러 특강을 했다. 페더도 그 제안을 받고 이들 앞에 선 적이 있었다. 심지어 마리는 그런 페더의 그림 모델로 나서준 적도 있었다. “…아, 마리 씨였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페더가 끝내 떠올려준 덕에, 마리는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마리도 나름대로 큰 용기를 낸 일이었다. 그 조심스러운 성격에도 먼저 인사를 건넨 것은 페더, 이 사람에 대한 호감 때문이었다. 금빛 머리칼에 턱수염을 기른 이 남자는 말과 행동이 단정했다. 평소에는 낙천적이지만, 붓과 팔레트만 쥐면 무서울 만큼 날카로워지는 면도 있었다. 그런 차이 또한 매력이었다. “차를 주문해 드릴까요?” 이번에는 페더가 먼저 물었다. 마리는 말없이 그를 봤다. “음, 좋아요.” 일부러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볼은 또 눈치 없이 붉어졌다.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마리 크뢰이어, 마리와 페더의 이중 초상화, 1890, 15x18.7cm, 스카겐 박물관
둘은 통하는 게 많았다.
두 사람 모두 여름의 바다를 좋아했다. 겨울의 부서지는 햇살도 사랑했다. 마리는 덴마크, 페더는 노르웨이 출신이었다. 다만 페더도 덴마크에서 보낸 시간이 긴 만큼 추억은 풍성했다. 서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고, 몇 번 식사를 더 하고, 몇 잔의 술잔을 건넬 무렵. 두 사람이 결혼을 말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래요. 좋아요.” 마리가 말했다. 수줍게 미소도 지었다. 이번에도 목소리는 작았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떨림이 있었다. 1889년, 7월. 마리와 페더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다. 마리 트리에프케에서 마리 크뢰이어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들 둘이 발 맞추는 정원에선 꽃가루가 흩날렸다. 빨강, 분홍, 그리고 파랑. 형형색색으로.
능력 있는 남편은… ‘높은 벽’처럼 보였다
마리 크뢰이어, 이탈리아 소녀의 초상, 1890년경, 패널에 유채, 19x11.5cm
소녀는 동그랗다.
눈도 동그랗고, 얼굴도 동그랗고, 두건과 원피스도 하나 같이 동글동글하다. 호기심에 찬 입가는 금방이라도 수십 가지 질문을 쏟아낼 듯하다. “언니는 화가예요?”, “저분이 남편이죠?”, “프러포즈는 누가 했어요?”와 같은. 마리는 허니문 기간 중 <이탈리아 소녀의 초상>을 그렸다. 아이의 맑은 순수함을 포착한 작품이었다. 마리와 페더는 여행을 길게 다녔다. 시작은 덴마크의 어촌마을 스텐비에르그였다. 이어 이탈리아 아말피와 라벨로 등을 함께 둘러봤다. 마리는 도중에 장티푸스를 앓기도 했다. 몸은 조금 약해졌지만, 다행히 병 기운은 털어낼 수 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이제 능력 있는 남편이 있고, 가정의 안정이 있고, 여전히 빛나는 젊음이 있었다. 하지만, 들뜬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리는 몰랐다.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입체적으로 작동하는 곳이라는 점을.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 힙, 힙, 후라(만세)!, 1887~1888, 캔버스에 유채, 134.5x165.5cm, 예테보리 미술관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 라벨로의 여인숙(레스토랑), 1890, 캔버스에 유채, 48.3x60.3cm, 히르슈프룽 컬렉션
마리는 결혼 후에도 계속 붓을 쥐고 싶었다.
그래서 1891년, 한 전시회에 남편 페더와 나란히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과연 페더는 페더였다. 그의 그림은 찬란했다. 직전 여행과 체류 경험이 그의 세계관을 그새 더 넓힌 듯했다. 페더는 어느덧 <힙, 힙, 후라(만세)!>와 <라벨로의 여인숙(레스토랑)>을 그릴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빛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었다. 인물의 표정과 동작을 정확히 묘사하는 일을 넘어, 이들 각자가 품은 사연까지 오롯이 녹여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페더는 이미 10대 시절부터 덴마크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금메달을 받은 수재였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단 화가 레옹 보나의 제자였으며, 에두아르 마네와 클로드 모네 등 동시대 가장 파격적인 예술가들과 직간접적 인연도 있었다.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 작업하는 마리, 1890, 패널에 유채, 24.6x34.8cm, 스카겐 박물관
“마리 씨. 아니, 이제 크뢰이어 부인이죠. 부인 그림도 감상 잘했습니다.”
…내 그림도? 마리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속이 쓰렸다. 마리도 기술은 좋았다. 그 시절 흔치 않은 여성 화가로 산다는 것. ‘살아남아’ 활동을 이어간다는 자체가 실력과 가능성의 증표였다. 그녀는 ‘아름다움이 곧 진리이자, 진리가 곧 아름다움(Beauty is truth, truth beauty·시인 존 키츠)’이라는 말을 믿고 따른, 자기 감각에 자부심이 큰 예술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리는 페더 앞에서 차츰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페더는 남편이자 든든한 동료 화가인 한편, 그녀의 의욕을 꺾게 하는 단단한 벽이 되고 있었다.
나는 때때로 내 모든 노력이 헛된 것이라고 생각해.
극복해야 할 게 너무 많아.
(…)
내가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결코, 결코 진정으로 위대한 성취를 이루지는 못할 거야.
그녀는 언젠가부터 이처럼 자조하는 순간이 잦아졌다. 마리는 섬세했다. 그렇기에 본인에게 유독 가혹한 면도 있었다. 부부는 보통 여름에는 스카겐, 겨울에는 코펜하겐 등을 오가며 살았다. 스카겐은 세 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고요한 물결과 모래알이 끝없이 깔린 땅이었다. 그곳은 진작부터 예술가 공동체가 꾸려질 만큼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있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마리가 스카겐에 있는 동안 그린 것으로 확실히 볼 수 있는 그림은 한 점뿐이라고 한다. 당시 그녀의 심란함이 얼마나 크고 깊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만, 마리가 붓을 놓게 된 정확한 이유에 대해선 명확히 밝혀진 게 없다.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 마리 크뢰이어, 1891, 캔버스에 유채, 32x34cm, 스카겐 박물관
페더는 그런 마리에게 위로를 주지 못했다.
페더는 바빴다. 도시를 오가며 계속 그림을 그렸다. 아내를 다독일 여유가 많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페더는 마리를 자기 모델로 삼을 때도 많았다. 동일 선상에 있는 화가가 아닌 모델. 붓을 든 주체가 아닌, 화가의 손짓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객체. 페더는 마리가 모델로서 아름답기에 그렸을 것이다. 구도와 포즈 등 작업 이해도도 높았기에 더욱 자주 찾았을 터였다. 결과적으로는, 이 또한 마리의 복잡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행보였다. 마리는 1895년에 딸 비베케를 안았다. 언젠가부터 마리가 하는 건 육아와 집안일 뿐이었다. 집을 꾸미고 가구를 디자인하는 등 나름의 ‘예술적’ 시도도 해봤지만, 완전한 돌파구가 될 수는 없었다. 푸르른 바다 앞 마리의 우울함은 깊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울 때가 아니었다. 곧 들이닥치는 다른 일로 인해, 그녀는 눈물을 펑펑 쏟아야 했기에.
더는 통하지 않는 마음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 스카겐 해변의 여름 저녁(화가와 그의 아내), 1899, 캔버스에 유채, 135x187cm, 히르슈프룽 컬렉션
마리와 페더가 스카겐의 해변을 걷고 있다.
달이 물결을 민다. 그사이 바람도 배를 밀어낸다. 마리는 한층 더 축축해진 달빛 앞에서 묘한 표정을 짓는다. 흰옷은 이제 빛을 품지 않는다. 그녀의 초점은 더 옅어졌고, 인상과 모습 또한 서글퍼졌다. 페더는 그런 마리의 팔에 손가락을 건다. 다시 발을 맞춰보려는 듯 방향도 틀어본다. 둘은 여름의 반짝이는 바다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지금 두 사람의 마음은 통하지 않는다. 반려견 랩만이 눈치 없이 부츠를 핥을 뿐이다. 페더의 1899년 작품,<스카겐 해변의 여름 저녁(화가와 그의 아내)>이다.
당시 페더의 몇몇 동료는 이 화폭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익어가는 달빛, 이는 그 시절 상징주의자들 사이에서 ‘죽음의 도래’ 정도로 해석되곤 했기에. 그런데 그림을 그리고 몇 달 후, 페더는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잊은 과거, 잃어버린 직업
마리 크뢰이어, 직조기 앞에서, 1890, 패널에 유채, 47.4x58cm, 스카겐 박물관
마리 크뢰이어, 바느질하는 여인이 있는 실내, 연도미상, 캔버스에 유채, 46x38.2cm, 스카겐 박물관
1900년의 어느 날.
페더는 덴마크의 또 다른 해안 도시, 미델파르트의 정신병원에서 첫 입원 생활을 했다. 페더에게 찾아온 병의 이름은 조울증이었다. 정확히 무엇 때문에 이 병에 걸렸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페더의 어머니 또한 만성적인 조울증을 앓았기에, 학계에선 유전의 가능성도 제시하곤 한다. 드러난 병은 더는 숨지 않았다. 끝까지 목을 꼿꼿하게 세웠다. 페더는 이번 병원 생활 이후로도 생을 다할 때까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야 했다.
물론 페더 본인이 가장 힘들었겠지만, 그런 남편의 파고를 감당해야 하는 마리 또한 매일이 쉽지 않았다. 페더의 기복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페더는 여전히 많은 순간 쾌활했다. 작업에도 열정적으로 임했다. 아내와 자식에게 마음도 쏟았다. 여행도 잘 다녔고, 친구들과 편지 또한 꾸준히 주고받았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마리를 더 눈물짓게 했다. 마리도 최선을 다했다. 그녀는 집안을 살피고, 아이를 돌보고, 종종 웅크린 채 밑바닥을 긁고 있는 페더를 다독였다. 언젠가 인구조사 공무원이 집에 찾아왔을 때, 마리는 직업을 묻는 말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제 직업은요….” 주부? 모델? 간병인? 마지막까지도 떠오르지 않던 단어는 화가였다. 그것은, 참으로 씁쓸한 일이었다.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 스카겐 해변에서 열리는 하지 전야 모닥불(화폭 가운데 모자를 쓴 채 배에 기대있는 남녀가 휴고 알프벤과 마리 크뢰이어), 1906, 캔버스에 유채, 257x149.5cm, 스카겐 박물관
어떤 사랑은 절망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1902년, 페더가 일이 있어 파리를 찾은 그해. 마리는 홀로 시칠리아섬의 타오르미나로 여행을 떠났다.
거기서 거짓말처럼 한 남자를 만났다.
이름은 휴고 알프벤. 마리보다 다섯 살 어린 음악가였다. 페더와는 또 다른 느낌의 단정함이 있는 예술가였다. 휴고가 마리의 손을 무심코 잡았을 때, 그녀의 볼은 다시 붉어지고 말았다. 이는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소용돌이에 휩쓸리기를 택했다. 심해의 끄트머리에서 건져올릴 수 있는 건, 불륜녀라는 낙인밖에 없다는 걸 알고서도. 마리와 페더는 1905년에 이혼했다. 페더는 이미 마리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원래는 붙잡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마리가 다른 남자와의 관계에서 아이를 가졌다는 점을 안 순간, 이혼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마리는 곧 딸 마르기타를 출산했다. 아이의 성은 역시나 크뢰이어가 아닌, 알프벤이었다. 둘은 갈라섰다. 두 사람의 인연, 그것은 바다 위 달빛처럼 반짝이다가, 일렁이다가, 끝내 부서지는 결말이었다.
삶이라는 예술
마리 크뢰이어와 딸. 손을 잡은 모습.
페더는 1909년에 죽었다.
마리와의 이혼 후 4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죽은 곳은 스카겐, 나이는 쉰여덟 살이었다. 그쯤 페더는 몸과 마음 모두 온전하지 못했다. 그의 감정은 마리가 사라진 후부터 더욱 크게 요동쳤다. 이 와중에 심각한 시력 저하도 겪어야 했다. 죽기 직전에는 사실상 눈이 먼 상태였다는 말도 있다. 마리는? 1912년에 새롭게 결혼식을 올렸다. 상대는 역시나 휴고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끝도 좋지만은 않았다. 마리는 휴고에게 바람기가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예물을 주고받은 건, 딸 마르기타의 삶 때문이었다. 불길한 예감은 들어맞았다. 마리는 결국 휴고와도 이혼한다. 염려했던 그 문제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둘은 마리의 그림 소유권을 놓고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 마리의 말년에 대해선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가 스톡홀름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는 말 정도만 소문처럼 떠돌 뿐이다. 마리는 1940년에 눈을 감았다. 사인은 암이었다.
마리 크뢰이어와 딸, 소파에 앉아있는 모습
페더에게 인사를 한 날, 그에게 벽을 느껴 붓을 멀리한 순간, 난장판이 돼가는 집을 다독이고, 이를 버티다 못해 다른 남자와의 사랑을 꿈꾼 시절.
마리의 삶은 늘 극적인 고민과 선택의 연속이었다. 오랜 시간 마리는 한 위대한 화가의 아내이자 모델로 기록에 쓰였다. 하지만, 그렇게만 보기에는 무척 입체적인 인생이다. “적어도, 나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 고뇌했어요.” 마리는 이 말을 하고 싶지 않을까. 이런 삶도 있었다. 이런 삶도 예술이 될 수 있고, 예술로 다뤄질 수 있는 법이다.
참고자료
스카겐 박물관
Halkier, Katrine, Krøyer: An International Perspective, Hirschsprung Collection
Hornung, Peter Michael, Peder Severin Krøyer, Fogtdal
Olsen, Claus & National Gallery of Ireland, Krøyer and the artists‘ colony at Skagen, National Gallery of Ireland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 장미, 마리가 정원 접이식 의자에 앉아있는 풍경, 1893, 캔버스에 유채, 76.5x67.5cm, 스카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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