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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야마토주소 ─ 슬롯머신 추천 ─㎄ 85.rde254.top ╊양인자는 6년전 남편 김희갑과 함께 경기도 용인의 한 실버타운으로 왔다. “처음 방문했을 때도 가을이었는데 단풍이 작정하고 홀리더라”라고 했다. 사진을 찍던 날, 타운 내 단풍은 들지 않았지만 곱게 핀 코스모스가 가을이 왔음을 실감케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재학 시절 양인자가 노트에 미리 쓴 신춘문예 당선 소감이다. 부산여중 3학년 때 쓴 소설 ‘돌아온 미소’가 책으로 나와 인기를 끌면서 ‘한국의 프랑수아즈 사강’으로 불렸던 그였다. 하지만 신춘문예의 벽은 높았다. 해마다 1월 1일 펀드가입방법
당락을 알게 된 후, 다음 1년을 버티기 위해 미리 수상 소감을 썼다.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일어서기 위해서.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으니까.
끝내 신춘문예 당선 소감문으로 쓸 수는 없었다. 대신 전 국민이 아는 노랫말이 됐다. 가수 조용필이 부른 ‘킬리만자로의 표범’. 지난 추석 연휴 방영돼 최고 시청률 18.2%를 1억투자처
찍은 조용필 콘서트에서 이 40년산(産) 노래는 명곡이 주는 위대함을 다시금 증명했다. ‘심장을 움켜쥐는 듯하다’ ‘한 폭의 시(詩) 같은 가사’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철학적 질문과 존재론적 고뇌가 느껴진다’ 같은 감상평이 줄을 이었다.
콘서트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기도 용인의 한 실버타운에서 남편 김희갑(89)씨와 함께 살고 황금성먹튀
있는 작사가 양인자(80)씨를 만났다. 김희갑은 한국 대중문화의 황금기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작곡가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비롯해 지난 60년간 3000여 곡의 노래를 만들었다. 오는 5일엔 그의 음악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바람이 전하는 말’이 개봉한다.
양인자는 “외출이 여의치 않아 (조용필) 콘서트까진 못 갔다”면서 “휴핸드폰바다이야기
대전화로 내 것은 찾아서 봤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내 것’은 ‘그 겨울의 찻집’ ‘Q’ ‘킬리만자로의 표범’으로, 모두 그가 작사하고 남편이 곡을 붙인 것이다.
양인자가 자필로 가사를 적은 ‘킬리만자로의 표범’ 악보. /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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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과의 위대한 만남
이번 콘서트에 등장한 세 곡을 포함, 양인자는 ‘서울 서울 서울’ ‘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 등 가장 많은 조용필 노래(21곡) 가사를 썼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나온 지 올해로 40년이 됐습니다.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가 뭘까요.
“방송을 보며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은 여전히 한 가지 질문을 갖고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 지금 제대로 살고 있어?’ 하는 그런 질문. 그 질문 때문에 그 노래를 좋아하고, 거기서 위로도 받는 게 아닐까요.”
−신춘문예에서 떨어진 스스로를 일으키기 위해 쓴 글이라고 들었습니다.
“한 번에 다 쓴 건 아니고요. 신춘문예에서 떨어질 때마다 실의에 빠진 나를 일으켜 세우려고 여기저기 한 줄씩 쓴 내용에 살을 붙인 게 가사가 됐어요. ‘여기가 끝이 아니야, 일어나’ 이런 말도 써놓고. 메모해 놓은 거 정리하다 보니 여기저기 유언도 얼마나 많이 써놨는지 몰라요(웃음).”
−남편이 곡을 만드셨죠.
“가요를 쓰다 보면 ‘나 그대를 만나서 행복했고, 즐거웠고’ 그러면 3분 끝이에요. 뭔가 해야 할 얘기를 안 한 것만 같아서, 얘기를 할 수 있게끔 곡을 써줄 수 없느냐고 (남편에게) 물어봤어요. 꼭 3분 안에 끝나야 하느냐고 물으니, 방송 특성상 그렇대요. 방송 안 하는 곡은 안 쓰느냐고 했더니, 그렇게 할 얘기가 많으면 한번 다 써보라고 하더군요. 내레이션 부분을 따로 두고 곡을 썼습니다. 진짜 거기에 맞는 노래를 만들었더군요.” 곡의 길이는 5분 26초. 당시로선 엄청난 파격이었다.
지난 6일 방영된 조용필 콘서트 '조용필, 이 순간을 영원히'의 한 장면./KBS
−이 노래를 여전히 40년 전과 같이 소화하는 75세의 조용필씨도 대단했습니다.
“제가 하는 말이 있어요. 조용필이란 가수가 하는 걸 보면 왜 위대한지 그 이유를 안다고. 사람이 만나면 밥 먹는 얘기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해야 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 얘기만 해요. 음악에 눈뜨고 음악에 눈 감는 사람이죠. 사람들이 킬리만자로의 표범 내레이션을 들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에요. 조용필씨만큼 이걸 잘해 내는 이는 여태껏 보지 못했어요.”
−길이가 19분에 달하는 ‘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 같은 실험적인 노래도 함께 작업하셨죠.
“대부분 가수는 조금만 다른 시도를 하려고 해도 ‘일전에 히트한 그 노래 같은 거 없어요’ 합니다. 그런데 조용필씨는 해보자고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 작업이 재밌죠. 19분짜리면 방송을 탈 수가 없거든요. 너무 기니까요. 그런데도 그걸 했고, 참 좋아했어요.” 양인자는 자신이 작업한 조용필 노래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곡으로도 이를 꼽았다. “녹음 시간이 저녁인데, 아침부터 녹음실에 와서 이 19분짜리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완곡으로 연습하는 걸 보고 왜 조용필이 조용필인지 알았다”고 했다.
−조용필을 처음 만났을 땐 어땠나요.
“‘창밖의 여자(조용필 1집 타이틀곡)’를 쓴 배명숙 작사가 소개로 한 찻집에서 만났는데, 사람이 통통거리며 걸어와 앉는 게 노랫말이 아니라 사탕을 몇 개 쥐여주고 싶은 귀여움이 있더군요(웃음). 그때도 조용필씨는 이미 유명했어요. 그런데도 노랫말을 받아드는 태도는 너무나 정중했습니다.”
양인자는 "지난 1월 콘서트에서 마지막으로 조용필을 봤다"며 "왠지 이번이 보는 게 마지막일 것 같다고 하니 '왜 그럴 소릴 하느냐'고 해 웃었다"고 말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소설·드라마 딛고 작사가로
양인자는 1945년 함경북도 나진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그곳에서 여섯 달을 살다 부산으로 왔다. 먹고사는 일이 우선이었던 1960년, 해방둥이의 일상에 소설 같은 일이 끼어들었다.
−부산여중 3학년 때 쓴 소설 ‘돌아온 미소’가 이듬해 책으로 출간됐죠.
“당시 한 장 분량 정도의 작문을 내라는 게 방학 숙제였어요. 쓰다 보니 700장이 넘어갔어요. 선생님들이 내용에 놀랐던 것 같진 않아요. 그저 남들은 한 장 해오는 숙제를 저 혼자 700장 넘게 썼으니 그게 신기한 것 아니었을까요.”
그의 겸손과 달리 어린 소녀의 우정을 담은 이 소설은 국어 선생님의 추천으로 출간돼 1년 만에 5쇄를 찍었다. 양인자에겐 ‘한국의 사강’이란 별명이 붙었다. 19세에 등단한 프랑스 여류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을 빗댄 것이다.
−그 문재(文才) 뛰어난 소녀가 신춘문예엔 번번이 낙방했군요.
“10년 응모해서 낙방하고, 더 이상 응모 안 했으니 영원히 낙방한 거죠. 나중에 다른 작가 추천으로 등단해 작가의 열쇠를 받긴 했는데, 결국 내 방은 못 찾았어요. 이후 소설을 몇 편 쓰기도 했지만, 그런다고 소설가가 되진 않더군요. 소설가의 ‘가’는 집 가(家) 자를 쓰잖아요. 하나의 집을 이뤄야 하는데, 방도 못 찾았으니 끝내 소설가는 되지 못한 셈이죠.”
그는 대학 졸업 후 월간지 ‘여학생’에서 기자로 일했다. 드라마 작가 김수현이 동료였다.
−김수현 작가의 권유로 드라마 작가의 길을 걸으셨다고요.
“김수현씨가 저보다 두 살 위인데, 처음엔 같이 소설을 썼어요. 둘 다 신춘문예에 떨어져 김수현씨가 ‘먹고 죽게 쥐약 사 오라’고 해 제가 진짜 사 간 일도 있었죠(웃음). 저는 소설에 대해 미련을 계속 못 버렸는데, 김수현씨는 방송 쪽으로 후회 없이 갔어요. 당시만 해도 글 쓰는 사람 중 드라마 작가를 인정하는 이가 드물었는데도 김수현씨가 그러더군요. ‘우리가 가서 놀아야 할 곳은 저기야’.”
김수현 작가의 첫 드라마 공모 대본도 그가 대신 냈다. 김 작가가 “가만 보니 난 참 재수가 나쁜데, 넌 참 재수가 있다”고 해서 생긴 일이었다. “김수현씨가 자리를 비운 사이 보자기에 싸인 원고를 잠깐 꺼내 읽어봤는데, 어찌나 재밌던지 이대로 김수현씨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 정도더라”고 했다. 이 대본이 추후 라디오 드라마와 영화로도 제작된 김수현의 데뷔작 ‘저 눈밭에 사슴이’다. 이후 양인자도 드라마 작가로 돌아서 ‘부부만세’ ‘제3교실’ 등을 썼다.
−드라마 작가 일은 어땠나요.
“죽기 아니면 살기로 쓰면 언젠가는 김수현씨처럼 되지 않을까 했는데, 그게 노력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더군요. 드라마 작가로서 제가 원하는 정도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김희갑·양인자 콤비의 서막
1985년 양인자는 자신의 인생을 바꿀 전화를 받는다. 작곡가 김희갑의 전화. 당시 양인자는 종종 자신의 드라마 주제곡에 들어갈 가사를 직접 썼는데, 이를 눈여겨본 김희갑이 연락한 것이다.
−무슨 내용의 전화였나요.
“써놓은 가사 있으면 한번 보자고 하더군요.”
그렇게 하루 만에 써 나간 가사가 “안개 속에서/나는 울었어/외로워서/한참을 울었어~”로 시작되는 가수 혜은이의 ‘열정’이다. 작곡가 김희갑·작사가 양인자 콤비의 시작을 본격적으로 알린 곡이다. 두 사람은 이후 만난 지 2년만에 동료에서 부부로 발전하며 조용필 노래를 비롯해 김국환의 ‘타타타’, 문주란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 임주리 ‘립스틱 짙게 바르고’, 이선희 ‘알고 싶어요’, 뮤지컬 ‘명성황후’ 주요 넘버(노래) 등 함께 400여 곡을 만들었다.
−하룻밤 만에 가사를 어떻게 쓰나요.
“‘그 겨울의 찻집’은 경복궁 근처 한 찻집에서 다른 일행들이 이야기하는 사이 혼자 심심해 5분 만에 썼는걸요(웃음). 글 쓰는 사람 머리엔 항상 뭔가가 담겨 있잖아요. 내 얘기, 본 얘기, 들은 얘기…. 무에서 유를 창조하진 못합니다. 늘 내 속에 있던 걸 쓰는 거죠. 그러니 어쩌면 창작을 한다는 건 실은 세상을 표절하는 건지도 모르지요.”
−김수현의 ‘사랑이 뭐길래’에 ‘타타타’가 나와 공전의 히트를 했지요. 김 작가와 친분이 있어 가능했던 건가요?
“김수현 작가는 그런 부분에선 철저해요. ‘타타타’가 나올 줄 꿈에도 모르고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를 보다가, 혼자 깜짝 놀라 ‘어머, 어머’만 연발했어요. 사실 김국환씨가 ‘타타타’를 내놓고 1년을 눈물 나게 홍보를 다녔거든요. 그래도 안 돼 실의에 빠져 있을 때였는데, 드라마에 나오고 딱 일주일 만에 세상이 뒤집어지더군요.”
−동료로서 김희갑 작곡가와의 작업은 어떠셨나요.
“저는 선생님을 만난 게 누구도 가져갈 수 없는 저의 절대적인 복이라고 생각해요. 가사를 쓰면 대부분 작곡가들은 곡에 맞춰 가사를 바꿔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가사에 맞게 멜로디를 고쳐주는 사람이에요. 다음 생에 작사가로 다시 태어나도 선생님을 못 만난다면 저는 이렇게 많은 곡을 쓸 수 없을 겁니다.” 양인자는 남편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두 분이 함께한 작업 중에서 ‘명성황후’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얼마 전 공연 30주년을 맞았는데.
“올해 초 30주년 감사패를 준다고 해 리셉션에 참석했는데, 선생님이 컨디션이 좋지 않아 1막도 끝나기 전에 가자고 해요. ‘그땐 그랬지’ 이런 얘기를 하면 좋았을 텐데…. 많이 아쉬웠지요.”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 CGV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영화 ‘바람이 전하는 말’ 시사회에 참석한 양인자와 김희갑. 영화는 김희갑의 60년 음악 여정을 담았다. 양인자는 “이날은 선생님 컨디션이 원더풀했다”며 “원래 하던 가락이 있어 포즈 취하는 일에 어려움이 없으시더라”고 웃었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다시 태어나도 김희갑의 아내로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 CGV에서 열린 영화 시사회에서도 양인자와 동행한 김희갑은 “영화를 많이 봐달라”고만 짧게 인사했다. 김희갑은 6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
“뇌경색 후유증으로 인지 장애를 앓고 있어요. 청력도 서서히 잃고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몰라도, 저는 느낄 수 있잖아요. 선생님이 조금 이상해지시는구나. 그래서 모든 게 보호가 되는 장소로 가야겠다 싶어 여기(실버타운)로 왔어요.”
당초 부부가 함께하는 인터뷰를 제안했지만, 김희갑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양인자만 응했다.
−언젠가 가수 조영남이 신문에 ‘양인자·김희갑은 서로를 종교처럼 믿고 산다’고 썼더군요.
“서로 나이가 든 다음에 만났기 때문에(두 사람은 각각 사별·이혼의 아픔이 있다) 파바박 전기 튀는 건 없었지만, 서로를 존중했어요. 같이 작업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생님은 문학을, 저는 음악을 모르잖아요. 그러니 서로 존중만 할 수 있지 비난은 할 수가 없었죠. 선생님이 제가 쓴 모든 가사가 맘에 들진 않았을 거예요. 그럼 일단 그걸 받아다가 서랍 안에 두세요. 저 역시도 선생님이 만든 멜로디가 다 맘에 들진 않잖아요. 그럼 그냥 서랍에 둬요. 집 서랍엔 그런 게 무수히 남아 있습니다(웃음).”
양인자는 “다음 생을 믿진 않지만, 혹시 그런 선택지가 있다면 그때도 김희갑의 아내로 살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아닐 것 같아요. 제가 음식을 너무 못하거든요. 가사를 쓰니까 그걸로 봐준 거죠(웃음).”
−두 분이 다시 곡 작업을 하는 날이 올까요.
“이 상태에서도 곡을 쓸 수 있을까 해서 (김희갑 작곡가에게) 가사 하나 준 게 있어요. 제목은 ‘나 80의 강을 건너가네’. 이게 1년이 돼 가거든요. 계속 들여다보고는 있더라고요. 어느 날은 ‘할 생각이 없나’ 해서 악보를 치워버리면, 정신이 조금 났을 때 ‘악보랑 펜 어디 있지’ 해요. 선생님은 작업 스타일이 모든 걸 머리에서 완벽하게 해놓고 악보는 그냥 글 쓰듯 하거든요. 언젠가는 되지 않을까 싶어 빈 악보만 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양인자는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만든 노래만큼은 복잡한 승인 절차 없이 후배 가수들이 편하게 부르면 좋겠다”고도 했다. “무슨 노래든 불려야 그 노래가 세월을 이겨낼 수 있거든요. 세월을 이겨내는 노래여야만 오래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봐요.”
−좋은 가사란 뭐라고 생각하세요.
“잘 담근 김치 같은 것? 처음부터 와락 그렇게 좋아지진 않거든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 김치가 발효되듯,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익어갑니다. ‘그 겨울의 찻집’ 녹음할 때 조용필씨가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 이 부분을 자꾸 ‘재’로 발음하는 거예요. 그런데 세월 지나 생각하니 ‘사랑은 아름다운 재’가 맞더군요. 세월의 먼지처럼 날아가 버리는 아름다운 재일 뿐인 거죠. 익을 게 익고 다듬어질 게 다듬어져 결국 가슴에 와닿는 게 좋은 가사입니다.”
−여전히 킬리만자로의 표범이고 싶나요.
“무슨 소리. 이제는 추운 것도 싫고, 얼어 죽는 것도 싫어요, 하하!”
그러나 여든의 양인자는 매일 아침 일어나 가사를 쓴다. 여전히 세상에 안주하지 않는 표범인 건 분명해 보였다.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재학 시절 양인자가 노트에 미리 쓴 신춘문예 당선 소감이다. 부산여중 3학년 때 쓴 소설 ‘돌아온 미소’가 책으로 나와 인기를 끌면서 ‘한국의 프랑수아즈 사강’으로 불렸던 그였다. 하지만 신춘문예의 벽은 높았다. 해마다 1월 1일 펀드가입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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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하는 말이 있어요. 조용필이란 가수가 하는 걸 보면 왜 위대한지 그 이유를 안다고. 사람이 만나면 밥 먹는 얘기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해야 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 얘기만 해요. 음악에 눈뜨고 음악에 눈 감는 사람이죠. 사람들이 킬리만자로의 표범 내레이션을 들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에요. 조용필씨만큼 이걸 잘해 내는 이는 여태껏 보지 못했어요.”
−길이가 19분에 달하는 ‘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 같은 실험적인 노래도 함께 작업하셨죠.
“대부분 가수는 조금만 다른 시도를 하려고 해도 ‘일전에 히트한 그 노래 같은 거 없어요’ 합니다. 그런데 조용필씨는 해보자고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 작업이 재밌죠. 19분짜리면 방송을 탈 수가 없거든요. 너무 기니까요. 그런데도 그걸 했고, 참 좋아했어요.” 양인자는 자신이 작업한 조용필 노래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곡으로도 이를 꼽았다. “녹음 시간이 저녁인데, 아침부터 녹음실에 와서 이 19분짜리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완곡으로 연습하는 걸 보고 왜 조용필이 조용필인지 알았다”고 했다.
−조용필을 처음 만났을 땐 어땠나요.
“‘창밖의 여자(조용필 1집 타이틀곡)’를 쓴 배명숙 작사가 소개로 한 찻집에서 만났는데, 사람이 통통거리며 걸어와 앉는 게 노랫말이 아니라 사탕을 몇 개 쥐여주고 싶은 귀여움이 있더군요(웃음). 그때도 조용필씨는 이미 유명했어요. 그런데도 노랫말을 받아드는 태도는 너무나 정중했습니다.”
양인자는 "지난 1월 콘서트에서 마지막으로 조용필을 봤다"며 "왠지 이번이 보는 게 마지막일 것 같다고 하니 '왜 그럴 소릴 하느냐'고 해 웃었다"고 말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소설·드라마 딛고 작사가로
양인자는 1945년 함경북도 나진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그곳에서 여섯 달을 살다 부산으로 왔다. 먹고사는 일이 우선이었던 1960년, 해방둥이의 일상에 소설 같은 일이 끼어들었다.
−부산여중 3학년 때 쓴 소설 ‘돌아온 미소’가 이듬해 책으로 출간됐죠.
“당시 한 장 분량 정도의 작문을 내라는 게 방학 숙제였어요. 쓰다 보니 700장이 넘어갔어요. 선생님들이 내용에 놀랐던 것 같진 않아요. 그저 남들은 한 장 해오는 숙제를 저 혼자 700장 넘게 썼으니 그게 신기한 것 아니었을까요.”
그의 겸손과 달리 어린 소녀의 우정을 담은 이 소설은 국어 선생님의 추천으로 출간돼 1년 만에 5쇄를 찍었다. 양인자에겐 ‘한국의 사강’이란 별명이 붙었다. 19세에 등단한 프랑스 여류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을 빗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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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학 졸업 후 월간지 ‘여학생’에서 기자로 일했다. 드라마 작가 김수현이 동료였다.
−김수현 작가의 권유로 드라마 작가의 길을 걸으셨다고요.
“김수현씨가 저보다 두 살 위인데, 처음엔 같이 소설을 썼어요. 둘 다 신춘문예에 떨어져 김수현씨가 ‘먹고 죽게 쥐약 사 오라’고 해 제가 진짜 사 간 일도 있었죠(웃음). 저는 소설에 대해 미련을 계속 못 버렸는데, 김수현씨는 방송 쪽으로 후회 없이 갔어요. 당시만 해도 글 쓰는 사람 중 드라마 작가를 인정하는 이가 드물었는데도 김수현씨가 그러더군요. ‘우리가 가서 놀아야 할 곳은 저기야’.”
김수현 작가의 첫 드라마 공모 대본도 그가 대신 냈다. 김 작가가 “가만 보니 난 참 재수가 나쁜데, 넌 참 재수가 있다”고 해서 생긴 일이었다. “김수현씨가 자리를 비운 사이 보자기에 싸인 원고를 잠깐 꺼내 읽어봤는데, 어찌나 재밌던지 이대로 김수현씨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 정도더라”고 했다. 이 대본이 추후 라디오 드라마와 영화로도 제작된 김수현의 데뷔작 ‘저 눈밭에 사슴이’다. 이후 양인자도 드라마 작가로 돌아서 ‘부부만세’ ‘제3교실’ 등을 썼다.
−드라마 작가 일은 어땠나요.
“죽기 아니면 살기로 쓰면 언젠가는 김수현씨처럼 되지 않을까 했는데, 그게 노력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더군요. 드라마 작가로서 제가 원하는 정도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김희갑·양인자 콤비의 서막
1985년 양인자는 자신의 인생을 바꿀 전화를 받는다. 작곡가 김희갑의 전화. 당시 양인자는 종종 자신의 드라마 주제곡에 들어갈 가사를 직접 썼는데, 이를 눈여겨본 김희갑이 연락한 것이다.
−무슨 내용의 전화였나요.
“써놓은 가사 있으면 한번 보자고 하더군요.”
그렇게 하루 만에 써 나간 가사가 “안개 속에서/나는 울었어/외로워서/한참을 울었어~”로 시작되는 가수 혜은이의 ‘열정’이다. 작곡가 김희갑·작사가 양인자 콤비의 시작을 본격적으로 알린 곡이다. 두 사람은 이후 만난 지 2년만에 동료에서 부부로 발전하며 조용필 노래를 비롯해 김국환의 ‘타타타’, 문주란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 임주리 ‘립스틱 짙게 바르고’, 이선희 ‘알고 싶어요’, 뮤지컬 ‘명성황후’ 주요 넘버(노래) 등 함께 400여 곡을 만들었다.
−하룻밤 만에 가사를 어떻게 쓰나요.
“‘그 겨울의 찻집’은 경복궁 근처 한 찻집에서 다른 일행들이 이야기하는 사이 혼자 심심해 5분 만에 썼는걸요(웃음). 글 쓰는 사람 머리엔 항상 뭔가가 담겨 있잖아요. 내 얘기, 본 얘기, 들은 얘기…. 무에서 유를 창조하진 못합니다. 늘 내 속에 있던 걸 쓰는 거죠. 그러니 어쩌면 창작을 한다는 건 실은 세상을 표절하는 건지도 모르지요.”
−김수현의 ‘사랑이 뭐길래’에 ‘타타타’가 나와 공전의 히트를 했지요. 김 작가와 친분이 있어 가능했던 건가요?
“김수현 작가는 그런 부분에선 철저해요. ‘타타타’가 나올 줄 꿈에도 모르고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를 보다가, 혼자 깜짝 놀라 ‘어머, 어머’만 연발했어요. 사실 김국환씨가 ‘타타타’를 내놓고 1년을 눈물 나게 홍보를 다녔거든요. 그래도 안 돼 실의에 빠져 있을 때였는데, 드라마에 나오고 딱 일주일 만에 세상이 뒤집어지더군요.”
−동료로서 김희갑 작곡가와의 작업은 어떠셨나요.
“저는 선생님을 만난 게 누구도 가져갈 수 없는 저의 절대적인 복이라고 생각해요. 가사를 쓰면 대부분 작곡가들은 곡에 맞춰 가사를 바꿔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가사에 맞게 멜로디를 고쳐주는 사람이에요. 다음 생에 작사가로 다시 태어나도 선생님을 못 만난다면 저는 이렇게 많은 곡을 쓸 수 없을 겁니다.” 양인자는 남편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두 분이 함께한 작업 중에서 ‘명성황후’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얼마 전 공연 30주년을 맞았는데.
“올해 초 30주년 감사패를 준다고 해 리셉션에 참석했는데, 선생님이 컨디션이 좋지 않아 1막도 끝나기 전에 가자고 해요. ‘그땐 그랬지’ 이런 얘기를 하면 좋았을 텐데…. 많이 아쉬웠지요.”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 CGV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영화 ‘바람이 전하는 말’ 시사회에 참석한 양인자와 김희갑. 영화는 김희갑의 60년 음악 여정을 담았다. 양인자는 “이날은 선생님 컨디션이 원더풀했다”며 “원래 하던 가락이 있어 포즈 취하는 일에 어려움이 없으시더라”고 웃었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다시 태어나도 김희갑의 아내로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 CGV에서 열린 영화 시사회에서도 양인자와 동행한 김희갑은 “영화를 많이 봐달라”고만 짧게 인사했다. 김희갑은 6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
“뇌경색 후유증으로 인지 장애를 앓고 있어요. 청력도 서서히 잃고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몰라도, 저는 느낄 수 있잖아요. 선생님이 조금 이상해지시는구나. 그래서 모든 게 보호가 되는 장소로 가야겠다 싶어 여기(실버타운)로 왔어요.”
당초 부부가 함께하는 인터뷰를 제안했지만, 김희갑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양인자만 응했다.
−언젠가 가수 조영남이 신문에 ‘양인자·김희갑은 서로를 종교처럼 믿고 산다’고 썼더군요.
“서로 나이가 든 다음에 만났기 때문에(두 사람은 각각 사별·이혼의 아픔이 있다) 파바박 전기 튀는 건 없었지만, 서로를 존중했어요. 같이 작업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생님은 문학을, 저는 음악을 모르잖아요. 그러니 서로 존중만 할 수 있지 비난은 할 수가 없었죠. 선생님이 제가 쓴 모든 가사가 맘에 들진 않았을 거예요. 그럼 일단 그걸 받아다가 서랍 안에 두세요. 저 역시도 선생님이 만든 멜로디가 다 맘에 들진 않잖아요. 그럼 그냥 서랍에 둬요. 집 서랍엔 그런 게 무수히 남아 있습니다(웃음).”
양인자는 “다음 생을 믿진 않지만, 혹시 그런 선택지가 있다면 그때도 김희갑의 아내로 살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아닐 것 같아요. 제가 음식을 너무 못하거든요. 가사를 쓰니까 그걸로 봐준 거죠(웃음).”
−두 분이 다시 곡 작업을 하는 날이 올까요.
“이 상태에서도 곡을 쓸 수 있을까 해서 (김희갑 작곡가에게) 가사 하나 준 게 있어요. 제목은 ‘나 80의 강을 건너가네’. 이게 1년이 돼 가거든요. 계속 들여다보고는 있더라고요. 어느 날은 ‘할 생각이 없나’ 해서 악보를 치워버리면, 정신이 조금 났을 때 ‘악보랑 펜 어디 있지’ 해요. 선생님은 작업 스타일이 모든 걸 머리에서 완벽하게 해놓고 악보는 그냥 글 쓰듯 하거든요. 언젠가는 되지 않을까 싶어 빈 악보만 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양인자는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만든 노래만큼은 복잡한 승인 절차 없이 후배 가수들이 편하게 부르면 좋겠다”고도 했다. “무슨 노래든 불려야 그 노래가 세월을 이겨낼 수 있거든요. 세월을 이겨내는 노래여야만 오래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봐요.”
−좋은 가사란 뭐라고 생각하세요.
“잘 담근 김치 같은 것? 처음부터 와락 그렇게 좋아지진 않거든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 김치가 발효되듯,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익어갑니다. ‘그 겨울의 찻집’ 녹음할 때 조용필씨가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 이 부분을 자꾸 ‘재’로 발음하는 거예요. 그런데 세월 지나 생각하니 ‘사랑은 아름다운 재’가 맞더군요. 세월의 먼지처럼 날아가 버리는 아름다운 재일 뿐인 거죠. 익을 게 익고 다듬어질 게 다듬어져 결국 가슴에 와닿는 게 좋은 가사입니다.”
−여전히 킬리만자로의 표범이고 싶나요.
“무슨 소리. 이제는 추운 것도 싫고, 얼어 죽는 것도 싫어요, 하하!”
그러나 여든의 양인자는 매일 아침 일어나 가사를 쓴다. 여전히 세상에 안주하지 않는 표범인 건 분명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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