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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캐리는 1954년 영국 옥스퍼드대에 입학해 강사-교수-석좌교수-명예교수로 평생을 보낸 영문학자지만, 옥스퍼드 특유의 귀족적 속물주의에 비평으로 또 일상의 언어로 사납게 맞섰던 '아웃사이더'였다. 그는 귀족-엘리트 집단이 자신들의 고급 취향을 과시하는 망토처럼 순문학(예술)을 향유하고, 또 의도나 성취와 별개로 난해한 어휘와 문장으로 일반 독자를 유리시킨 모더니즘 작가들의 문학적 엘리트주의를 비판하고 경계했다. 2004년의 캐리.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게티이미지.
해럴드 블룸(Harold Bloom, 1930~2019)은 ‘서구 정전의 수호자 야마토게임무료다운받기 ’란 평을 얻은 미국 영문학자다. 그는 단테나 밀턴 등 주요 고전 26권을 추려 문학의 보편적 가치와 심미적 준거로 제시한 1994년 저서 ‘서구의 정전(The Western Canon)’에서 문학에 페미니즘이나 탈식민주의, 역사주의 등을 비평의 잣대로 들이대는 것은 미학적 타락이라 주장했다. 자신이 속한 (광의의) 예일학파의 해체주의를 포함, 1970년대 검증완료릴게임 이후 유행한 저 새로운 정치 사회적 비평 경향들을 ‘원한의 학파(School of Resentment)’라 폄하했고, 자신의 미학적 기준(독창성, 초월성, 보편성)에 못 미치는 작품은 작가가 누구든 가차없이 비판하곤 했다.
‘정전’ 작가들 중에서도 그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숭배'했다. 자타공인 셰익스피어 권위자인 그는 1998년 평전 릴게임몰 ‘셰익스피어: 인간의 발명’에서, 셰익스피어는 단지 희곡을 쓴 게 아니라 현대 인류가 느끼고 생각하는 바의 기준, 다시 말해 현대적 의미의 인간성 자체를 발명했다고 썼다.
중세 유럽이 이교도를 타자화했듯, 순문학-순수예술에 대한 이해와 수용성이 교양과 무지, 귀족-엘리트와 문화적 천민을 가르는 기준이 된 세월도 길다. 20세기 초 잉글랜 골드몽사이트 드 식민지였던 아일랜드 출신 극작가 겸 페비이언 사회주의자 조지 버나드 쇼가 셰익스피어에 대한 비이성적 숭배를 비꼬며 그의 별칭인 ‘에이번의 시인(The Bard of Avon)’과 ‘우상숭배(Idolatry)’를 합성한 ‘바돌러트리(Bardolatry, 셰익스피어 숭배)’란 말을 만든 데에는 저 이분법에 대한 민족적-계급적 반감이 있었을 것이다.
오징어릴게임영국 옥스퍼드대 머턴(Merton)칼리지 영문학자 존 캐리(John Carey, 1934.4.5~ 2025.12.11)가 블룸의 평전 서평을 자신이 연재하던 일간지(Sunday Times)에 썼다. “블룸의 문체는 과도하게 자아도취적(self-indulgent)이며, 주목할 만한 통찰도 없이 똑같은 주장만 (768페이지에 걸쳐) 지루하게 되풀이할 뿐이다.(…) 셰익스피어의 삶은 틀림없이 이 책보다는 덜 지루했을 것이다.”
캐리가 ‘조롱’한 것도 영문학계와 소위 문화 엘리트 집단이 셰익스피어를 소비하는 행태, 즉 계급적 위상에 걸맞은 고급 취향을 과시하려는 행태였다. 캐리는 16세기의 셰익스피어(문학)는 ‘교양’이 아니라 ‘현장’이었으며, 그의 연극이 상연되던 ‘글로브 극장’도 고상한 귀족뿐 아니라 서민들이 술을 마시며 함께 즐기던, 극 전개가 못마땅하면 야유를 퍼붓기도 하던 오락- 유희의 공간이었다고, 그래서 셰익스피어의 언어에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귀족의 언어뿐 아니라 저잣거리 은어와 비속어들이 섞여 있어야 했고, 지성을 만족시킬 만한 고도의 수사학과 더불어 대개가 문맹이었을 대중들의 심장을 뛰게 할 날것의 언어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라고, 그것이야말로 셰익스피어(문학)의 가치이자 매력이라고 썼다.
예술, 특히 문학을 대중에게서 유리시켜 계급-교양의 망토처럼 전유하려던 학계와 영국적 귀족-엘리트 속물주의에 대해, 그 아성인 옥스퍼드대 심장부에서, 거의 계급적 분노를 담아 전투적으로 치받았던 영문학자 존 캐리가 별세했다. 향년 91세.
한미한 중산층 장학금 세대인 존 캐리는 "학문-지식의 요새가 아니라 계급의 요새"인 옥스퍼드에서, 귀족-상류층 출신 교수-학생들의 가시적-비가시적 차별과 모욕을 여러 차례 겪었다. 케임브리지대 영문학자 스테판 콜리니는 탁월한 학자인 그의 "과도한 계급적 적대감"이 평생 치유받지 못한 상처의 흔적일 수 있다고 여겼다. 옥스퍼드대 St. 존스 칼리지 사진
캐리는 1934년 영국 런던 남서부 반스(Barnes)의 한 중산층 가정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회계사였던 아버지가 대공황으로 실직해 디자인회사 비서직으로 재취업한 뒤부터 전업주부 어머니는 쪼들리며 아이들을 키웠다. 형제들 중 혼자 공부벌레였다는 캐리는 공립학교(Richmond & East Sheen Boy’s Grammar School)를 다니며 체스터턴과 버나드 쇼, 도데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개교 이래 첫 옥스퍼드대(St. John’s College) 장학생이 됐다. 우편으로 온 장학증서와 합격증을 보며 흔들리던 부모의 표정을 그는 훗날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부모님은 그것(합격증)이 나를 그들로부터 멀리, 그들이 속하지 못한다고 느끼던 어딘가로 데려갈 것임을 예견하신 듯했다.”
그 ‘예견’을 이해하려면, 또 교수-석좌교수-명예교수로 평생을 보낸 그가 모교의 심장에 비수를 꽂게 되는 그 서사의 기울기를 이해하려면, 19세기 이후 단행된 두 차례 영국 교육개혁을 살펴봐야 한다.
1867년 선거법으로 보편 참정권 시대를 연 영국은 1870년 초등교육 의무화(초등교육법, 일명 Forster’s Act)’로 보편 문해력 시대를 열었다.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전유물이던 활자(문학)가 서민 계층으로 확산된 거였다. 19세기 말 통속소설과 옐로저널리즘, 대중 잡지들이 쏟아져 나온 배경이 그거였다. 하지만 보편 교육에도 불구하고 서민 계층이 ‘옥스브리지’ 엘리트 코스에 진입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공립학교 출신이 라틴어 등 명문대 진학에 특화한 커리큘럼으로 공부한 이튼(Eton) 등 명문 사립(public school) 출신들과 경쟁하는 것도 무척 힘들었지만, 터무니없이 비싼 학비도 넘기 힘든 장벽이었다. 그걸 허문 게 1944년 개정 교육법(Butler Act)이다. 부모 신분과 직업, 재산에 상관없이 뛰어난 학생은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국가가 장학금을 지원하기로 한 것. 캐리의 합격증은 이무기의 등에 돋아난 용의 날개 같은 거였다.
캐리는 18개월 군 복무 뒤 54년 입학해 57년 최우등으로 학부를 마쳤고, 장학금과 강사, 주니어 펠로십 등을 징검다리 삼아 크라이스트처치- 베일리얼(Balliol), 키블(Keble) 등 여러 칼리지를 거쳐 만 26세 때인 60년 머턴 칼리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곧장 키블 칼리지 영문학과 정교수로 임용됐다.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호그와트 대연회장으로 쓰인 옥스퍼드대 크라이스트처치 홀 전경.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는 옥스퍼드대의 가장 보수-귀족적인 칼리지 중 하나로, 학생 식당으로도 쓰이는 저곳에선 라틴어 식전기도가 지금도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위키피디아.
옥스퍼드는 대학(학부)-칼리지 이원구조로 운영된다. 각기 다른 전통과 학풍을 지닌 43개 칼리지를 통해 선발된 학생들은 대학 공통 과목 외에 칼리지 교수와의 1대 1 튜터링 토론 학습을 병행해야 한다. 그래서 교수- 졸업생의 정체성은 학문-생활 공동체라고도 불리는 출신 칼리지에 크게 좌우된다. 즉 캐리는 가장 보수적-귀족적인 칼리지 중 하나인 ‘크라이스트처치’와 가장 학구적-진보적인 ‘베일리얼’의 기준을 두루 충족시킨 신예 학자였다. 오비디우스 관련 논문으로 학위를 받은 그는 밀턴의 ‘기독교 교리’와 시들을 번역하고, 디킨스와 새커리(Thackeray)의 평전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20대 말에 전통과 재정 면에서 키블보다 나은 머턴으로 자리를 옮겼고, 75년 불과 40세에 석좌교수(Merton Professor)가 됐다. 장학금으로 입학한 ‘듣보잡’ 학생이 옥스퍼드 심장부에 뿌리를 내린 셈이었다.
듣보잡? 옥스퍼드의 ‘장학금 출신(Scholarship Boy)’들은, 한국의 사회배려자 전형 입학생처럼, 입학 후에도, 심지어 교수가 돼도 귀족-상류층 출신 ‘퍼블릭스쿨 보이’들의 정서적 차별과 물리적 따돌림을 겪곤 했다. 우스꽝스러우리만치 까다로운 식사 매너서부터 교수들(Dons)만 앉을 수 있다는 ‘하이테이블(High Table)’과 라틴어 식전기도 등등. 말투와 걸음걸이가 곧 신분증이었다.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 강사시절, 25세의 그가 케인스 전기 작가로 유명한 귀족 출신 교수 로이 해로드( Sir Roy Harrod)가 주재한 만찬에 끼어 앉게 됐다. 해로드가 외부 인사들에게 칼리지 식구들을 일일이 소개하다가 캐리를 건너뛰자 한 참석자가 “저분은 누구냐”고 물었다고 한다. 캐리는 해로드가 “저 사람은 아무것도 아냐(Oh, That’s nobody)”라며 일축한 일화를 의미심장한 제목의 2014년 자서전 ‘뜻밖의 교수(The Unexpected Professor: An Oxford Life in Books)’에 썼다.
캐리가 계급적 분노의 포문을 연 저서 ‘지식인과 대중(The Intellectuals and The Masses: Pride and Prejudice Among the Literary Intelligentsia 1880-1939)’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지식인들은 대중이 글을 읽기 시작하자, 대중이 읽을 수 없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천박한 서민’들이 ‘고결한 문학’에 손을 대는 걸 귀족-상류층은 그 문화적 재앙-언어의 오염이라 여겼고, 그 반작용으로 엘리트 집단이 구축한 ‘문화(문학)의 장벽’이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모더니즘 문학’이라는 게 캐리의 생각이었다. T.S 엘리엇과 버지니아 울프, 제임스 조이스, 예이츠, 에즈라 파운드, DH 로렌스, 플로베르 등 모더니즘의 여러 거장들이, 그들의 의도였든 아니든 그 ‘지식인들’이었고, ‘텔레그래프’지 표현을 빌리자면 그가 그들의 ‘경동맥’을 물어뜯은 까닭이 그거였다.
“평범한 10대가 성인을 대할 때의 증오와 경멸을 벗어나지 못했”던 플로베르는 그에겐 “영원한 사춘기 소년”이었고, 엘리엇이 ‘황무지’에서 인용한 수많은 고전 문구와 라틴어 그리스어 산스크리트어 등 생경한 외국어들은 천재 시인의 언어실험인 동시에 “일반 독자는 이해할 수 없도록 설계된 일종의 지적 암호문”이었다. 난해한 복합언어와 해체적 문법 때문에 거의 해독이 불가능하다는 평을 듣는 ‘피네건의 경야’ 등 조이스의 말년 작품들은 문학을 연구실에 가두는 결과를 초래(혹은 의도)한 작품이고, 군중을 짐승 무리로 묘사하며 “저들의 신경은 굵고 둔해서, 우리가 겪는 미세한 정신적 고뇌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 썼던 울프의 문장은 엘리트적 오만의 물증이었다.
정교수가 된 직후인 70년대 중반, 그는 한 매체(The New Review)에 옥스퍼드대 교수들- 특히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의 귀족적 속물주의를 고발하는 에세이 ‘교수들을 타도하라(Down with Dons)’를 발표했다. 대학 부총장을 지낸 귀족 출신 고전학자 모리스 보우라(Maurice Bowra)가 지인들과 함께 주변 사람들의 말투를 엿듣고는, 마치 들으란 듯 큰소리로 그들의 계층-계급을 분류했다는 일화가 거기 나온다. 그 에세이는 '지식인과 대중’에 재수록되면서 널리 읽혔다.
20여 권의 문학-역사 관련 전문서를 (공동)집필하고, 여러 작품집을 번역하고, 앤솔러지를 출간한 그가 70년대 중반부터 근 50년간 일간지에 서평을 쓴 것도 아마도 문학의 대중화를 위해서일 것이다. 친구였던 동료 비평가 클라이브 제임스(Clive James)의 비평집 ‘The Metropolitan Critic(1974)’을 두고 그는 이렇게 평했다. “그의 글에는 불멸의 이름들이 마치 비듬처럼 흩날리는데, 그건 잘난 척하고 싶어 안달 난 고교생들의 백일장 에세이처럼 읽힌다.” ’가디언’지는 제임스가 30여 년이 지나도록 그 상처를 잊지 않고 이렇게 회상했다고 전했다. “그는 나름 대담하다고 생각하던 내 견해들을 쫓아다니며 목덜미를 물고 연한 살점을 뜯고 처참히 짓밟았다.(…) 더 고통스러웠던 건 그가 ‘글’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2005년 책 ‘예술의 쓸모(What Good Are the Arts?)’에서는 예술에 대한 비평적 심미안이 곧장 감상 주체에게 도덕적-정신적 미덕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라고 썼다.
존 캐리의 대표작 '지식인과 대중(1992)'과 자서전 '뜻밖의 교수(2004)' 표지. Faber & Faber
그의 문학적 영웅들은 H.G 웰스, 아놀드 베넷 등이었고, 특히 조지 오웰을 높이 평가했다. 그건 오웰이 좌파여서가 아니라 서민의 ‘진짜’ 삶을 쉽고 명료한 일상의 언어로 작품화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대처 정권에 우호적이었던 까닭도 대처가 우파여서가 아니라 대처리즘이 표방한 신분-학벌을 초월한 ‘능력-경쟁주의’ 때문이었다.
당연히 캐리 역시 숱한 비판-비평의 대상이 됐다. 그는 모더니즘 작가 및 작품을 비판하기 위해 논지에 맞는 구절들만 편파적으로 인용했다. 갓 작고한 작가를 신랄하게 폄하했다가 유족에게 면전에서 욕을 먹은 적도 있었다. ‘문학의 쓸모'를 두고 한 매체는 “책에서 제목에 대한 대답을 기대하진 말라”고 썼다. 작가 겸 저널리스트 오베론 워(Auberron Waugh)는 캐리가 여러 속물근성을 비판하면서도 영국 문단에 흔한, 또 다른 형태의 속물근성은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며 “내가 보기에 캐리도 어느 정도 그런 성향에 빠져 있는 듯한데, 그건 바로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확립하려는 광적인 욕망”이라고 지적했다.
케임브리지대 영문학자 스테판 콜리니(Stefan Collini)는 “명백하게 영민하고 교양 있는(게다가 모든 증언에 따르면 친절하고 호감 가는 인물인) 캐리가 귀족과 허세쟁이들에게 표출했던 유난한 적대감의 원인을 두고 “자신의 눈부신 경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진정 ‘평범한’ 이들의 편에 서 있다는 일종의 역설적 확신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며 그의 자서전은 “유머와 생생한 묘사로 가득한 풍요로운 삶의 기록인 동시에 어떤 상처는 결코 아물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평했다.
캐리는 학부시절 만나 60년 결혼한 아내(Gillian Booth)와 2남을 두었다. 그는 아마추어 양봉가였고, 가드닝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제자인 프린스턴대 영문학부 교수 로드리 루이스는, 캐리가 제자들에겐 늘 자상하고 헌신적인 스승이었다고 회고했다. 다만 외부 인사 초청 강연 땐 수틀리면 가차 없이 물어뜯으라고 부추겼는데, 한번은 스승이 “너희가 안 나서면 내가 나설 거야. 나보단 너희가 더 친절하겠지”라고 했다고 전했다.
“책(문학)은 우리 안에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던 카프카의 말을 즐겨 인용하곤 했다는 캐리는 2001년 석좌교수 은퇴 고별 강연에서 문학에서 어떤 ‘대답’이나 ‘교훈’을 찾지 말라며 “문학의 위대함은(…) 우리가 안다고 믿었던 것들을 의심하게 만드는 데 있다”고 말했다. 난해한 문학과 비평 언어에 대한 일침도 잊지 않았다. “전문 용어(jargon)는 지식의 증거가 아니라 사고의 게으름이나 배타성의 증거일 때가 많다. 지적으로 깊이 있는 통찰은 가장 단순한 언어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해럴드 블룸(Harold Bloom, 1930~2019)은 ‘서구 정전의 수호자 야마토게임무료다운받기 ’란 평을 얻은 미국 영문학자다. 그는 단테나 밀턴 등 주요 고전 26권을 추려 문학의 보편적 가치와 심미적 준거로 제시한 1994년 저서 ‘서구의 정전(The Western Canon)’에서 문학에 페미니즘이나 탈식민주의, 역사주의 등을 비평의 잣대로 들이대는 것은 미학적 타락이라 주장했다. 자신이 속한 (광의의) 예일학파의 해체주의를 포함, 1970년대 검증완료릴게임 이후 유행한 저 새로운 정치 사회적 비평 경향들을 ‘원한의 학파(School of Resentment)’라 폄하했고, 자신의 미학적 기준(독창성, 초월성, 보편성)에 못 미치는 작품은 작가가 누구든 가차없이 비판하곤 했다.
‘정전’ 작가들 중에서도 그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숭배'했다. 자타공인 셰익스피어 권위자인 그는 1998년 평전 릴게임몰 ‘셰익스피어: 인간의 발명’에서, 셰익스피어는 단지 희곡을 쓴 게 아니라 현대 인류가 느끼고 생각하는 바의 기준, 다시 말해 현대적 의미의 인간성 자체를 발명했다고 썼다.
중세 유럽이 이교도를 타자화했듯, 순문학-순수예술에 대한 이해와 수용성이 교양과 무지, 귀족-엘리트와 문화적 천민을 가르는 기준이 된 세월도 길다. 20세기 초 잉글랜 골드몽사이트 드 식민지였던 아일랜드 출신 극작가 겸 페비이언 사회주의자 조지 버나드 쇼가 셰익스피어에 대한 비이성적 숭배를 비꼬며 그의 별칭인 ‘에이번의 시인(The Bard of Avon)’과 ‘우상숭배(Idolatry)’를 합성한 ‘바돌러트리(Bardolatry, 셰익스피어 숭배)’란 말을 만든 데에는 저 이분법에 대한 민족적-계급적 반감이 있었을 것이다.
오징어릴게임영국 옥스퍼드대 머턴(Merton)칼리지 영문학자 존 캐리(John Carey, 1934.4.5~ 2025.12.11)가 블룸의 평전 서평을 자신이 연재하던 일간지(Sunday Times)에 썼다. “블룸의 문체는 과도하게 자아도취적(self-indulgent)이며, 주목할 만한 통찰도 없이 똑같은 주장만 (768페이지에 걸쳐) 지루하게 되풀이할 뿐이다.(…) 셰익스피어의 삶은 틀림없이 이 책보다는 덜 지루했을 것이다.”
캐리가 ‘조롱’한 것도 영문학계와 소위 문화 엘리트 집단이 셰익스피어를 소비하는 행태, 즉 계급적 위상에 걸맞은 고급 취향을 과시하려는 행태였다. 캐리는 16세기의 셰익스피어(문학)는 ‘교양’이 아니라 ‘현장’이었으며, 그의 연극이 상연되던 ‘글로브 극장’도 고상한 귀족뿐 아니라 서민들이 술을 마시며 함께 즐기던, 극 전개가 못마땅하면 야유를 퍼붓기도 하던 오락- 유희의 공간이었다고, 그래서 셰익스피어의 언어에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귀족의 언어뿐 아니라 저잣거리 은어와 비속어들이 섞여 있어야 했고, 지성을 만족시킬 만한 고도의 수사학과 더불어 대개가 문맹이었을 대중들의 심장을 뛰게 할 날것의 언어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라고, 그것이야말로 셰익스피어(문학)의 가치이자 매력이라고 썼다.
예술, 특히 문학을 대중에게서 유리시켜 계급-교양의 망토처럼 전유하려던 학계와 영국적 귀족-엘리트 속물주의에 대해, 그 아성인 옥스퍼드대 심장부에서, 거의 계급적 분노를 담아 전투적으로 치받았던 영문학자 존 캐리가 별세했다. 향년 91세.
한미한 중산층 장학금 세대인 존 캐리는 "학문-지식의 요새가 아니라 계급의 요새"인 옥스퍼드에서, 귀족-상류층 출신 교수-학생들의 가시적-비가시적 차별과 모욕을 여러 차례 겪었다. 케임브리지대 영문학자 스테판 콜리니는 탁월한 학자인 그의 "과도한 계급적 적대감"이 평생 치유받지 못한 상처의 흔적일 수 있다고 여겼다. 옥스퍼드대 St. 존스 칼리지 사진
캐리는 1934년 영국 런던 남서부 반스(Barnes)의 한 중산층 가정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회계사였던 아버지가 대공황으로 실직해 디자인회사 비서직으로 재취업한 뒤부터 전업주부 어머니는 쪼들리며 아이들을 키웠다. 형제들 중 혼자 공부벌레였다는 캐리는 공립학교(Richmond & East Sheen Boy’s Grammar School)를 다니며 체스터턴과 버나드 쇼, 도데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개교 이래 첫 옥스퍼드대(St. John’s College) 장학생이 됐다. 우편으로 온 장학증서와 합격증을 보며 흔들리던 부모의 표정을 그는 훗날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부모님은 그것(합격증)이 나를 그들로부터 멀리, 그들이 속하지 못한다고 느끼던 어딘가로 데려갈 것임을 예견하신 듯했다.”
그 ‘예견’을 이해하려면, 또 교수-석좌교수-명예교수로 평생을 보낸 그가 모교의 심장에 비수를 꽂게 되는 그 서사의 기울기를 이해하려면, 19세기 이후 단행된 두 차례 영국 교육개혁을 살펴봐야 한다.
1867년 선거법으로 보편 참정권 시대를 연 영국은 1870년 초등교육 의무화(초등교육법, 일명 Forster’s Act)’로 보편 문해력 시대를 열었다.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전유물이던 활자(문학)가 서민 계층으로 확산된 거였다. 19세기 말 통속소설과 옐로저널리즘, 대중 잡지들이 쏟아져 나온 배경이 그거였다. 하지만 보편 교육에도 불구하고 서민 계층이 ‘옥스브리지’ 엘리트 코스에 진입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공립학교 출신이 라틴어 등 명문대 진학에 특화한 커리큘럼으로 공부한 이튼(Eton) 등 명문 사립(public school) 출신들과 경쟁하는 것도 무척 힘들었지만, 터무니없이 비싼 학비도 넘기 힘든 장벽이었다. 그걸 허문 게 1944년 개정 교육법(Butler Act)이다. 부모 신분과 직업, 재산에 상관없이 뛰어난 학생은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국가가 장학금을 지원하기로 한 것. 캐리의 합격증은 이무기의 등에 돋아난 용의 날개 같은 거였다.
캐리는 18개월 군 복무 뒤 54년 입학해 57년 최우등으로 학부를 마쳤고, 장학금과 강사, 주니어 펠로십 등을 징검다리 삼아 크라이스트처치- 베일리얼(Balliol), 키블(Keble) 등 여러 칼리지를 거쳐 만 26세 때인 60년 머턴 칼리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곧장 키블 칼리지 영문학과 정교수로 임용됐다.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호그와트 대연회장으로 쓰인 옥스퍼드대 크라이스트처치 홀 전경.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는 옥스퍼드대의 가장 보수-귀족적인 칼리지 중 하나로, 학생 식당으로도 쓰이는 저곳에선 라틴어 식전기도가 지금도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위키피디아.
옥스퍼드는 대학(학부)-칼리지 이원구조로 운영된다. 각기 다른 전통과 학풍을 지닌 43개 칼리지를 통해 선발된 학생들은 대학 공통 과목 외에 칼리지 교수와의 1대 1 튜터링 토론 학습을 병행해야 한다. 그래서 교수- 졸업생의 정체성은 학문-생활 공동체라고도 불리는 출신 칼리지에 크게 좌우된다. 즉 캐리는 가장 보수적-귀족적인 칼리지 중 하나인 ‘크라이스트처치’와 가장 학구적-진보적인 ‘베일리얼’의 기준을 두루 충족시킨 신예 학자였다. 오비디우스 관련 논문으로 학위를 받은 그는 밀턴의 ‘기독교 교리’와 시들을 번역하고, 디킨스와 새커리(Thackeray)의 평전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20대 말에 전통과 재정 면에서 키블보다 나은 머턴으로 자리를 옮겼고, 75년 불과 40세에 석좌교수(Merton Professor)가 됐다. 장학금으로 입학한 ‘듣보잡’ 학생이 옥스퍼드 심장부에 뿌리를 내린 셈이었다.
듣보잡? 옥스퍼드의 ‘장학금 출신(Scholarship Boy)’들은, 한국의 사회배려자 전형 입학생처럼, 입학 후에도, 심지어 교수가 돼도 귀족-상류층 출신 ‘퍼블릭스쿨 보이’들의 정서적 차별과 물리적 따돌림을 겪곤 했다. 우스꽝스러우리만치 까다로운 식사 매너서부터 교수들(Dons)만 앉을 수 있다는 ‘하이테이블(High Table)’과 라틴어 식전기도 등등. 말투와 걸음걸이가 곧 신분증이었다.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 강사시절, 25세의 그가 케인스 전기 작가로 유명한 귀족 출신 교수 로이 해로드( Sir Roy Harrod)가 주재한 만찬에 끼어 앉게 됐다. 해로드가 외부 인사들에게 칼리지 식구들을 일일이 소개하다가 캐리를 건너뛰자 한 참석자가 “저분은 누구냐”고 물었다고 한다. 캐리는 해로드가 “저 사람은 아무것도 아냐(Oh, That’s nobody)”라며 일축한 일화를 의미심장한 제목의 2014년 자서전 ‘뜻밖의 교수(The Unexpected Professor: An Oxford Life in Books)’에 썼다.
캐리가 계급적 분노의 포문을 연 저서 ‘지식인과 대중(The Intellectuals and The Masses: Pride and Prejudice Among the Literary Intelligentsia 1880-1939)’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지식인들은 대중이 글을 읽기 시작하자, 대중이 읽을 수 없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천박한 서민’들이 ‘고결한 문학’에 손을 대는 걸 귀족-상류층은 그 문화적 재앙-언어의 오염이라 여겼고, 그 반작용으로 엘리트 집단이 구축한 ‘문화(문학)의 장벽’이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모더니즘 문학’이라는 게 캐리의 생각이었다. T.S 엘리엇과 버지니아 울프, 제임스 조이스, 예이츠, 에즈라 파운드, DH 로렌스, 플로베르 등 모더니즘의 여러 거장들이, 그들의 의도였든 아니든 그 ‘지식인들’이었고, ‘텔레그래프’지 표현을 빌리자면 그가 그들의 ‘경동맥’을 물어뜯은 까닭이 그거였다.
“평범한 10대가 성인을 대할 때의 증오와 경멸을 벗어나지 못했”던 플로베르는 그에겐 “영원한 사춘기 소년”이었고, 엘리엇이 ‘황무지’에서 인용한 수많은 고전 문구와 라틴어 그리스어 산스크리트어 등 생경한 외국어들은 천재 시인의 언어실험인 동시에 “일반 독자는 이해할 수 없도록 설계된 일종의 지적 암호문”이었다. 난해한 복합언어와 해체적 문법 때문에 거의 해독이 불가능하다는 평을 듣는 ‘피네건의 경야’ 등 조이스의 말년 작품들은 문학을 연구실에 가두는 결과를 초래(혹은 의도)한 작품이고, 군중을 짐승 무리로 묘사하며 “저들의 신경은 굵고 둔해서, 우리가 겪는 미세한 정신적 고뇌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 썼던 울프의 문장은 엘리트적 오만의 물증이었다.
정교수가 된 직후인 70년대 중반, 그는 한 매체(The New Review)에 옥스퍼드대 교수들- 특히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의 귀족적 속물주의를 고발하는 에세이 ‘교수들을 타도하라(Down with Dons)’를 발표했다. 대학 부총장을 지낸 귀족 출신 고전학자 모리스 보우라(Maurice Bowra)가 지인들과 함께 주변 사람들의 말투를 엿듣고는, 마치 들으란 듯 큰소리로 그들의 계층-계급을 분류했다는 일화가 거기 나온다. 그 에세이는 '지식인과 대중’에 재수록되면서 널리 읽혔다.
20여 권의 문학-역사 관련 전문서를 (공동)집필하고, 여러 작품집을 번역하고, 앤솔러지를 출간한 그가 70년대 중반부터 근 50년간 일간지에 서평을 쓴 것도 아마도 문학의 대중화를 위해서일 것이다. 친구였던 동료 비평가 클라이브 제임스(Clive James)의 비평집 ‘The Metropolitan Critic(1974)’을 두고 그는 이렇게 평했다. “그의 글에는 불멸의 이름들이 마치 비듬처럼 흩날리는데, 그건 잘난 척하고 싶어 안달 난 고교생들의 백일장 에세이처럼 읽힌다.” ’가디언’지는 제임스가 30여 년이 지나도록 그 상처를 잊지 않고 이렇게 회상했다고 전했다. “그는 나름 대담하다고 생각하던 내 견해들을 쫓아다니며 목덜미를 물고 연한 살점을 뜯고 처참히 짓밟았다.(…) 더 고통스러웠던 건 그가 ‘글’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2005년 책 ‘예술의 쓸모(What Good Are the Arts?)’에서는 예술에 대한 비평적 심미안이 곧장 감상 주체에게 도덕적-정신적 미덕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라고 썼다.
존 캐리의 대표작 '지식인과 대중(1992)'과 자서전 '뜻밖의 교수(2004)' 표지. Faber & Faber
그의 문학적 영웅들은 H.G 웰스, 아놀드 베넷 등이었고, 특히 조지 오웰을 높이 평가했다. 그건 오웰이 좌파여서가 아니라 서민의 ‘진짜’ 삶을 쉽고 명료한 일상의 언어로 작품화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대처 정권에 우호적이었던 까닭도 대처가 우파여서가 아니라 대처리즘이 표방한 신분-학벌을 초월한 ‘능력-경쟁주의’ 때문이었다.
당연히 캐리 역시 숱한 비판-비평의 대상이 됐다. 그는 모더니즘 작가 및 작품을 비판하기 위해 논지에 맞는 구절들만 편파적으로 인용했다. 갓 작고한 작가를 신랄하게 폄하했다가 유족에게 면전에서 욕을 먹은 적도 있었다. ‘문학의 쓸모'를 두고 한 매체는 “책에서 제목에 대한 대답을 기대하진 말라”고 썼다. 작가 겸 저널리스트 오베론 워(Auberron Waugh)는 캐리가 여러 속물근성을 비판하면서도 영국 문단에 흔한, 또 다른 형태의 속물근성은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며 “내가 보기에 캐리도 어느 정도 그런 성향에 빠져 있는 듯한데, 그건 바로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확립하려는 광적인 욕망”이라고 지적했다.
케임브리지대 영문학자 스테판 콜리니(Stefan Collini)는 “명백하게 영민하고 교양 있는(게다가 모든 증언에 따르면 친절하고 호감 가는 인물인) 캐리가 귀족과 허세쟁이들에게 표출했던 유난한 적대감의 원인을 두고 “자신의 눈부신 경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진정 ‘평범한’ 이들의 편에 서 있다는 일종의 역설적 확신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며 그의 자서전은 “유머와 생생한 묘사로 가득한 풍요로운 삶의 기록인 동시에 어떤 상처는 결코 아물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평했다.
캐리는 학부시절 만나 60년 결혼한 아내(Gillian Booth)와 2남을 두었다. 그는 아마추어 양봉가였고, 가드닝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제자인 프린스턴대 영문학부 교수 로드리 루이스는, 캐리가 제자들에겐 늘 자상하고 헌신적인 스승이었다고 회고했다. 다만 외부 인사 초청 강연 땐 수틀리면 가차 없이 물어뜯으라고 부추겼는데, 한번은 스승이 “너희가 안 나서면 내가 나설 거야. 나보단 너희가 더 친절하겠지”라고 했다고 전했다.
“책(문학)은 우리 안에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던 카프카의 말을 즐겨 인용하곤 했다는 캐리는 2001년 석좌교수 은퇴 고별 강연에서 문학에서 어떤 ‘대답’이나 ‘교훈’을 찾지 말라며 “문학의 위대함은(…) 우리가 안다고 믿었던 것들을 의심하게 만드는 데 있다”고 말했다. 난해한 문학과 비평 언어에 대한 일침도 잊지 않았다. “전문 용어(jargon)는 지식의 증거가 아니라 사고의 게으름이나 배타성의 증거일 때가 많다. 지적으로 깊이 있는 통찰은 가장 단순한 언어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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